연천 중면 인구 191명 불과... 남양주 진건, 최근 20년간
6천명 감소, 연평균 312명, 마을에 남은 ‘이야기’ 따라가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ㆍ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첫 번째 테마는 ‘마을’이다.
사람들은 집단을 이뤄 산다. 촌락 안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를 구축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땅 경기도엔 그만큼 다양한 생활상이 모여 있다.
하지만 어느 마을은 시대를 좇고, 어느 마을은 시대에 쫓긴다. 인구 수에 따라 차이가 크다. ‘대도시’, ‘신도시’가 아닌 관심 밖 소규모 마을을 찾아봤다.
지난해 기준 경기도에서 가장 적은 사람이 사는 곳은 연천군 중면이다. 경기도 최북단인 이 지역의 총 인구는 191명에 불과하다. 다음은 포천시 군내면(516명)이다. 이어 연천군 장남면(717명), 왕징면(965명) 인구가 네자릿수 이하로 3, 4위다.
최근 20년간 인구 감소 추이를 분석해 봤다.
인구가 가장 많이 줄어든 곳은 남양주시 진건읍이다. 2000년도 총 인구 수가 3만132명에 달했던 진건읍은 2020년 2만3천891명으로 6천여 명 이상 감소, 1년에 평균적으로 312명이 마을을 떠났다. 파주시 법원읍도 같은 시기 인구가 1만4천823명에서 1만1천99명(-3천724명)으로 줄었다. 평택시 진위면은 20년 전 1만4천929명 인구 중 3천354명이 빠져 이제는 1만1천575명만이 머문다. 진위면은 경기 남부지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크게 준 지역이다. 뒤이어 포천시 영북면(-2천488명), 연천군 신서면(-1천960명), 이천시 장호원읍(-1천710명) 등 순이다.
수많은 마을 중 G스토리팀은 포천시 관인면을 찾았다. 궁예의 폭정에 지쳐 관직을 내놓은 관리들이 모여 만든 곳으로, 남북분계선보다 더 위에 있었다. 1만여 명이 거주했던 인구가 이젠 2천여 명만 남았다. 사람은 떠났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남은 관인면으로 출발했다.
[G-Story] 마을편 ①텅 빈 골목, 황혼에 물든 시간: 포천시 관인면
2021년 여름의 끝자락, 북쪽을 향한다. 38선을 지나 강원도 철원군청보다 위에 있는 포천시 관인면에 도착한다. 과거 ‘관인’은 너그러운(寬) 사람(人)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었다. 후삼국시대 궁예가 태봉국(901~918년)을 세웠을 때, 그의 폭정과 신정 정치에 못 이겨 관직을 버린 관리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라는 의미다. 조선 정조시대 이후로 지명 속 한자가 벼슬 관, 어질 인(官仁)으로 바뀌었지만 뜻은 여전히 동일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예로부터 관인면은 무수한 곡식이 자라는 풍요로운 땅으로 정평이 났다. 6·25 당시엔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진 중심지다. 이북지역으로 북한의 통치를 받던 중 휴전이 시작되면서 남한에 수복됐다. 관인 땅을 놓친 김일성은 원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보름간 통곡했다는 설이 알음알음 전해진다.
■ 전쟁 모습 지우려는 계획도시…관인 르네상스 ‘반짝’
1960년대 들어 대한민국의 전후(戰後)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탄생한 계획도시가 바로 이곳 관인면이다. 연천군에 속해있다가 시가지를 중심으로 지역이 발전하면서 1983년 2월께 포천시(당시 포천군)에 편입됐다.
미군 40사단(일명 썬버스트ㆍSunburst)이 주둔하던 당시 관인면은 늘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1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해가 뜨나 달이 뜨나 도시를 지켰다. 낮에는 탄동리 관인중ㆍ고등학교에서 주민 체육대회가 열렸고, 밤에는 초과리 오리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을 즐기던 영화의 시대였다. 매월 2일과 7일 관인버스터미널 일대에서 펼쳐진 5일장엔 포천 주민은 물론이고 연천, 철원 사람들까지 장사진을 쳐 말 그대로 호황을 누렸던 곳, 여기 관인면이다.
30여 년간 이 땅의 변천사를 몸소 보고 들은 조관형 관인면장은 반가운 옛 추억을 떠올렸다. “예전 관인면은 뉴타운(New Town)으로 굉장히 잘 사는 동네였어요. 농사가 번영하고, 철광이 유명하고, 한탄강이 가까워 인구가 유입될 수밖에 없는 도시였죠.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도 전교생이 1천 명은 됐을 거에요. 1개 리(里)에만 5~6개의 학교가 있었으니까, 지금은 많아야 2개쯤인데…. 아무튼 그때는 정말 잘 살았어요. 한 학교 한 반에 학생이 60~70명씩 꽉 차고 그랬으니까요. 인심도 넉넉했죠. 옆집에 가서 밥도 그냥 얻어먹고…. 여학생은 고무줄놀이, 남학생은 총싸움 놀이하면서 함께 어울리는 놀이 문화도 활발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외지인에 벽치고 컴퓨터만 하는 시대잖아요. 그때는 그랬어요.”
■ 1년에 2명 태어나는 마을… 마지막 택시기사 떠나다
잔잔한 바람이 불고 느린 시간이 흐르는 오늘날의 관인면에는 중리, 냉정리, 삼율리 등 11개 마을이 있다. 정확히는 11개 마을‘만’ 있다. 지역경제를 이끄는 대기업도, 주민 건강을 보살피는 병ㆍ의원도 단 한 곳 없다. 지난해까지 마을에 존재했던 유일무이한 택시도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택시기사의 건강 악화로 운행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관인 주민들은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연천이나 철원에 택시를 보내달라며 ‘SOS’를 요청하곤 하는데 “손님이 많아 30분 뒤에 출발할게요”, “이동시간이 꽤 걸리니 기다리세요” 등 회신을 받기 일쑤다.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운 동네가 돼버린 셈이다.
관인면이 이처럼 조용해진 가장 큰 배경에는 ‘인구 소멸’이 있다. 군부대가 빠지면서 가족 단위 주민이 대폭 줄어든 데다가, 튼튼한 교육 시설이 부족해 청장년의 이탈마저 크게 늘었다. 더욱이 주변 신도시 발달로 주거ㆍ상업지가 이동하면서 마을 자체가 개점휴업 상태가 된 지 오래다.
불과 지난 1월까지만 해도 관인면엔 2천797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중 1천45명(37.3%)이 65세 이상 고령자였으며, 대부분 토착민이었다. 그런데 7개월여 흐른 현재, 주민 수는 2천745명으로 줄었다. 반년 사이 50명이 넘게 ‘어딘가’로 떠나면서 빠르게 인구가 감소했다.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도 어렵다. 올 한해 관인면에 출생신고를 한 신생아 수 역시 1명에 그친다. 평균적으로 한 해에 태어나는 아이는 2명이지만, 마을을 떠나는 인구는 88명에 달한다. 반세기 넘게 물리적 성장이 멈춘 초고령 도시라 일컬어지는 이유가 이 부분들에 있다.
■ 40년차 새댁, 사는 사람만 사는 동네
냉정리에 다다르면 비료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근처엔 목장과 쌀 가공센터 등이 있고 드넓은 평야가 자리한다. 풍광을 즐기는 동안 축축한 흙길 위에서 덜컹덜컹 트랙터를 몰던 ‘새댁’을 만났다. 주름진 손으로 이마 위 땀방울을 닦던 그에게 냉정리가 어떤 동네인지 묻자 “나는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타지인이라 잘 몰러. 저 빨간 지붕 밑에 초록 벽돌 밑에 검은 처마 집 보이지? 거기 아저씨가 잘 알어, 저기에 물어봐”라며 손짓하곤 멋쩍게 피했다. 그가 냉정리에 산 지는 올해로 4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동네의 ‘새댁’으로 불린단다. 그는 “아직도 나는 신혼이랴, 막내라고 일만 시키구 앉았네” 하며 크게 웃었다.
이윽고 ‘새댁’의 말을 따라 검은 처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골목 안 하나하나의 주택 마당에서 낯선 사람을 본 개들이 공격적으로 짖어댔다. 한바탕 소란에 슬리퍼를 신고 밖을 나온 박영섭 할아버지(75)는 문득 우두커니 서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 궁금해서 나와봤어”라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모처럼 말벗을 발견한 박 어르신은 “이 동네는 말도 못하게 잘 살았지. 벼농사가 잘돼 쌀이 맛있고, 인심도 좋고, 뭐 부족한 게 없었어. 면사무소 옆에 학교 가봤나? 옛날엔 그 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했다고. 사람이 어찌나 몰렸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여기 동네 사람들은 다 알지”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근데 이제는 누가 이런 시골에 오겠어. 사는 사람만 살어. 농사도 농협에 맡기고, 내 땅 내가 농사하는 사람도 적지. 누가 돈 주고 ‘농사 좀 같이 해요’ 부탁이나 해야 임대경작 하는 거야”라고 전했다.
■ “인구 감소는 시대적 흐름…발전 고민 따라 활성화 여부 달려”
그렇다고 관인면이 어두 컴컴 몰락하는 마을은 아니다. 도시재생을 위한 벽화 개선, 추억 향유를 위한 옛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필두로 농촌 개량 사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할만한 요소도 곳곳에 많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의 대모이자 선구자인 구옥희 골퍼가 관인면 출신이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오리나무 중 가장 오래된 노거수(수령 230년의 초과리 오리나무ㆍ2019년 천연기념물 지정)를 품기도 했다.
특히 울음산으로 불리던 명성산과의 연이 인상 깊다. 왕쟁이나루와 말등소의 이야기다. 왕쟁이나루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해 도주하다가 한탄강을 넘은 곳이다. 이곳 화강암 바위에 말발굽보다 큰 흔적이 하나 있는데,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며 말을 타고 가다가 상처를 낸 것이라는 설이 돈다. 말과 함께 잠시 쉬어간 곳이 말등소로 불리면서 일명 ‘말등소 전설’이 됐다.
“구전설화로 궁예가 자주 등장하고, 기라성 같은 의병장이 배출되고, 베이비붐이 조성되면서 인구 1만3천명이 넘었던 곳.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품격있는 이름의 동네가 있을까요”. 7대째 관인면에 사는 이우형 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57)은 되뇌었다. “수복 이후 미군이 설계한 중심공간 안에 인구가 급속하게 빨려 들어왔죠. 경제가 화랑을 누렸고,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까지 더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는 생활환경의 변화와 급격한 인구 감소가 매치되면서 지역사회 공동체가 점점 어둠의 방향으로 가고 있죠. 어쩌겠어요, 인구 감소는 시대적 흐름인데”.
그럼에도 마냥 비관적이진 않다. “무한한 잠재가치가 있어 우리가 시야를 좀 넓히면 지금보단 나아질 거에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삶의 터전이잖아요, 소중한 사람들의 공간이고. 고민의 질에 따라 지역이 어떻게 활성화할지 달려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도 노력하고 있고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경기도 최북단 지역들이 또다시 발전하는 기회가 우선적으로 주어지지 않겠어요?”
G-Story팀= 이연우기자, 민경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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