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ㆍ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의 두 번째 테마는 ‘놀이’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시대를 지나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 롤, 피파, 오버워치’를 넘어 다시 ‘구슬치기, 줄다리기, 오징어 게임’의 시대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ㆍ성별ㆍ연령별 수많은 놀이 문화가 존재했고, 수많은 변화가 일어왔다. 어떤 놀이는 삼삼오오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즐길 수 있었고, 어떤 놀이는 나 홀로 방 안에서 즐길 수 있었다.
경기도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놀이를 하며 여가를 보냈을까. ‘그땐 그랬지’ 하는 놀이는 무엇이 있을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경기도 곳곳의 대표적인 놀이터를 찾아봤다.
먼저 만화방이다. 지난 8월 통계청이 취합한 경기도 내 만화산업 관련 사업체는 2019년 기준 총 1천384개로 전국의 20.9% 상당을 차지했다. 서울(25.4%)에 이어 두 번째로 많지만 10년 전(2009년 2천199개)에 비하면 절반가량 사라진 수치다.
현재 경기도내 만화 출판사는 28곳, 만화방ㆍ만화카페 같은 만화 임대업체는 183곳이다. 각각 전국의 32.9%(85곳), 25.9%(704곳) 비중이라 평균적으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특히 체인점화 된 만화카페가 늘어난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해마다 만화 관련 사업체는 줄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애니메이션은 존재하는데 ‘만화방’은 왜 없어지고 있을까. G스토리팀은 1983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인 ‘창전사’를 찾았다. 속속 생기는 만화카페의 모티브가 된 오래된 만화방이면서 이천시 유일한 만화방이기도 하다. 한 페이지씩 종이 냄새를 넘기러 출발한다.
[G-Story] 놀이편 ①만화가게 아저씨는 오늘도 ‘추억’을 지킨다
11월3일 제21회 만화의 날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창전사 아저씨’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다. 건물 입구에 도착해 지하로 내려가기 전 계단 앞에서 잠깐 발걸음을 세웠다.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다. ‘텅 비어 있으면 어쩌지, 외롭고 암울한 대화만 나누면 어쩌지, 어둡고 퀴퀴한 분위기면 어쩌지’ 하는 등의 잡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기우였다.
방탄소년단 포스터를 넘자 ‘딸랑’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창전사 문을 여는 손님들을 환영하는 첫 번째 소리다. 곧바로 창전사 아저씨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두 번째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 이천 최고(最古)이자 유일한 만화방
창전사는 1983년부터 이천시 창전동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만화 가게’다. 이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만화방이면서, 현재 이천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만화방이다. 전국에 체인점이 늘어나고 있는 ‘만화 카페’의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5천원짜리 만화책은 500원에, 7천원짜리 만화책은 700원에 볼 수 있다. 소설책은 1천원, 잠들면 2천원이다. 예전엔 한 권당 값이 매겨졌는데 이젠 손님의 선호도에 따라 여느 만화 카페처럼 시간제로도 볼 수 있다. 시대적 흐름을 따라 새롭게 생겨난 계산법이다.
과거 창전사는 이천고, 이천양정여중ㆍ고, 이천실업고(현 이천제일고) 학생들의 ‘만남의 장’이었다. PC방도, 오락실도 없던 시대에 놀러 갈 곳이라곤 만화방뿐이었을 시절이다. 학교가 끝나면 교복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와 너도나도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몸 다툼을 했더란다. 결국 오손도손 서로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곤 했는데, 사실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슬쩍슬쩍 서로를 곁눈질했다는 걸 창전사 아저씨는 안다.
몇몇 학생들은 어른이 돼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자녀를 데리고 “아빠가 어릴 때 다녔던 만화 가게야”하는 남자도 있었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편지를 전해준 여자도 있었다. 지금은 다들 50~60대가 됐다.
“어휴, 옛날 생각나요. 어린 학생들이 그냥 ‘창전사 아저씨, 창전사 아저씨~’ 하고 불렀어요. 우리 가게가 워낙 오래돼서 그런지 가끔씩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죠. 그럴 때면 얼마나 고맙고 흐뭇한지 몰라요. 저 벽에 액자로 걸어놓은 그림도 예전에 한 여학생이 직접 그려서 갖다준 거에요. 마음이 참 예쁘죠, 저런 선물까지 주고. 옛날 생각이 정말 많이 나네요”. 창전사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일이건 주말이건 오전 8시30분~오후 9시 내내 불을 끄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숨어 있었다.
■ 하루 평균 30명 방문하지만 온라인엔 밀릴 수밖에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많은 책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스테디셀러는 아무래도 <슬램덩크>, <드래곤볼>, <열혈 강호>, <더 파이팅> 등이다. 현재까지도 찾는 손님이 꾸준해 손때가 자주 묻곤 한다. 예전엔 <공포의 외인구단>, <마제>의 인기가 높았고, 최근에는 결말이 나온 <하이큐>를 찾는 사람도 많다. ‘그 만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그 만화책들이 모두 창전사에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인 만화책이 총 10만 권에 달한다.
“손님이 얼마나 와요?”란 질문이 무색하게도, 창전사엔 계속 ‘딸랑’ 소리가 울렸다. 요즘도 종이로 된 만화책을 보는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정말 있었다. 심지어 생각보다 많았다. 창전사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게 6명의 손님이었을 정도다. 이후에도 2~3명이 들어와 제각각 떨어져 앉고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창전사 아저씨’ 이근호 사장님(68)은 “하루에 못해도 30명은 오지요, 주말엔 10명 정도가 더 많다고 해야 할까”라며 쪼르르 차를 따랐다. “누군가는 잘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젠 거의 없다고 봐야죠. 예전에는 ‘어느 정도’ 잘 된 게 아니고 ‘잘 돼도 너무’ 잘 됐거든요. 우리 가게 옆, 뒤 200m 안쪽에만 만화방 3개가 생겼을 정도니까…. 그런데 다 망했죠. 학생들은 컴퓨터 하러 가고,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휴대폰에서 찾아보고 그러잖아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본만화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인터넷으로 보는 방법이 있나 봐요. 우리는 10권을 들여왔는데 손님들은 ‘그거 11권 나왔어요, 이미 봤어요’ 하더라고요. 만화방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지.”
■ 사라진 총판, 책 가지러 서울까지…인기 없는 책은 소각
“그런데 어떻게 계속 운영하고 계신 거에요? 만화책 좋아하세요?”하자 이근호 사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만화책 안 좋아해요!”
이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느릿하게 다음을 이어갔다. “근데 만화일지언정 책으로 학생들이 배우는 거 아니겠어요? 재미도 있지만 역사도 묻어 있죠. 37~38년 전에 일본하고 사이가 안 좋았을 때가 있어요. 그때 일본만화 걸어놓고 장사하면 걸린다고, 다 버리라고 할 때가 있었다고. 근데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그게 쉽나요? 밤에 트럭 한 대 준비해서 강원도 산속에 땅 파고 몽땅 감춰놨다가 이틀 뒤에 찾아오고 그랬죠. 또 한 번은 북한하고 사이가 안 좋을 때라 책마다 빨간 글씨가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당시엔 군청이던 이천시청 앞에서 싹 거둬 태우고 그랬다고. 책이라는 게 그래요. 그런 모습들을 잊지 못하게 해요.”
도란도란 창전사 아저씨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손님들이 빠져나가 70여 개 좌석이 텅 비게 됐다. 새삼스레 포근하게 푹 꺼진 소파가, 빈 자장면 그릇이, 하이틴 코너 위 ‘서태지와 아이들’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엔 누렇게 바랜 책들 수십 권이 쌓여 있었다. 조만간 처분될 책들이다. 창전사에는 매일 같이 신작이 들어오는 만큼 매일 같이 원래 있던 책들이 자리를 내주곤 한다.
“총판이라고 하죠? 지금은 출판사라고 부르는데, 우리 지역을 담당하던 경기 남부 총판이 작년에 망해서 없어졌어요. 이제는 책을 사러 서울을 가거나 고양지역 총판에서 받아오죠.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에요. 코로나19 때부터 부쩍 택배를 이용하고 있는데 편하고 좋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가져오는 신작도 예전에 비하면 20%밖에 안 돼요. 80%가 사라졌어요. 그만큼 만화책을 만드는 곳도, 나르는 곳도 없어요.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의 다 그냥 죽었다고 보죠. 우리 가게에 있는 만화책도 그래요. 누구 주려고 해도 산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책들은 그냥 버립니다.”
■ “만화방 명맥 유지만 돼도 더이상 바랄 것 없어”
책들이 불태워지는 건 비단 창전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1989년부터 30년 넘게 수원 북문을 지키고 있는 A만화방도 매일같이 책을 버리기 일쑤다. 말그대로 ‘아무도 찾지 않아서’다. 더욱이 그동안 A만화방에 책을 납품해주던 영화동 B총판이 이달 말부터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신작을 들여올 수단마저 끊기게 됐다. 이제 만화방을 운영하면서 남은 일이라곤 ‘남은 책을 처분하는’ 것밖에 없다.
A만화방 대표(63)는 “매일같이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정 때문에 하고 있다”고 했다. “몇 명 남지 않았지만 단골손님들도 있고… 그래도 이 만화방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고 가정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이 많이 들었어요. 근데 B총판이 없어진다고 하니 책을 받을 데가 없어 막막하네요. B총판 직원도 ‘더이상 책을 공급할 데가 없어서 그만둔다’고 하던데, 그 얘길하면서 서로 눈시울을 붉히고 그랬어요. 내 삶을 영위했던 곳의 끝이 보인다고 하니 슬프죠. 제 아이들도 만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가게는 그만두라고 할 정도로 어려우니까요”라고 말했다.
강산이 여러 번 변하는 세월 동안 만화방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온 사장님들의 바람은 별것 없다. 커다란 수익을 기대하지도, 과거의 영광스런 부흥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가족의 안녕’과 ‘만화방의 명맥 유지’만 원했다.
만화책을 안 보는 만화방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인상깊다. “이왕이면 젊은 사람이 새로운 기분으로 우리 가게를 운영해보겠다고 하면 좋겠어요. 전부 다 개조해도 좋아요. 그래도 ‘만화방’은 살아있는 거잖아요. 종이 만화책은 특유의 매력이 있어요. 휴대폰으로 갑갑하게 보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게 즐길 수 있고, 페이지를 넘기는 맛도 있죠. 무엇보다 책 냄새가 나잖아요. 나도 그런 매력을 손님들에게 배웠거든. 이제 그런걸 다른 사람이 느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아무도 없어도 괜찮아요. 장사가 안 되는 걸 누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어쨌든 만화방은 굴러갈 거에요. 그때의 저는 설봉산에서 새 모이나 챙겨주며 ‘설봉산 새 아빠’로 살 거고요.”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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