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으로 밝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은빛으로 밝은, 눈이 쌓인 밤의 품에 널찍이 누워
모든 것은 졸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만이
누군가의 영혼의 고독 속에 잠 깨어 있을 뿐.
너는 묻는다. 영혼은 왜 말이 없느냐고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고-
그러나 영혼은 알고 있다.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
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
『릴케 시집』, 문예출판사, 2014.
슬픔으로 빛나는 인간의 영혼
얼마 전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와 시디, 그리고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플로피디스크를 정리했다. 버리고 나니 허전하고 쓸쓸했다.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건 비단 물건만이 아닐 듯하다. 영혼, 슬픔, 고독, 낭만 등등의 단어들은 그 쓰임과 빈도가 약해져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말 자체가 추상적이라서 혹은 시대가 변해서 그렇다고 나름의 이유를 대는데, 그런 답변은 실로 해로워 보인다. 어떤 말들의 소멸은 곧 정서(情緖)의 몰락을 지시한다. 기술 시대의 위험은 쓸모를 강조하고 정서를 등한히 해 인간을 좀비처럼 만든다는 점이다. 영혼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과학적 시비를 따질 게 아니라 왜 우리에게 ‘영혼’이라는 말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은빛으로 밝은」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 왜 숭고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눈이 쌓여 모든 사물이 밤의 품 안에서 평화롭게 졸고 있는데, 오직 “걷잡을 수 없는 슬픔”만이 “누군가의 영혼의 고독 속”에 홀로 깨어 있다는 1연의 상황은 요즘의 감수성으로 보자면 촌스럽고 어설퍼 보일 수 있다. 슬픔과 고독과 영혼이라는 단어가 연이어 나오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큰 규모의 단어 연결이 엉성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은빛으로 밝은”이라는 시어 때문이다. 슬픔과 고독은 인간의 영혼을 눈처럼 희고 순수하고 밝게 만드는 힘이라는 게 릴케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게 슬픔과 고독이다. 그래서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라고 영혼에 묻는다. 하지만 영혼은 대답이 없다. 슬픔이란 제거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슬픔을 없애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없애는 것과 같다. 그것을 릴케는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늘 슬퍼해야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은 지극히 유아적이다. 슬픔과 고독을 어떻게 단련해 인간이라는 한 점의 ‘별’을 빛나게 만들 것인가, 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그런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는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영혼이란 만져지고 느껴지는 ‘실체’라기보다는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의 ‘신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숭고는 그런 신념에서 나온다. 신념이 없으면 비루해진다. ‘영혼’이라는 말이 뜬구름처럼 모호할지라도 그 말을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이유는 ‘은빛으로 밝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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