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전투서 첫 승리로 사기 충전했지만 이현전투서 패배하며 마을까지 초토화 잔여 의병은 남한산성으로 근거지 옮겨
■ 단발령 시행, 불 붙은 의병운동
이른바 전기 의병은 을미사변 이후 시작됐다. 그런데 경기도 최초 의병운동인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한 다음날인 1895년 12월31일(음력 11월16일)에 일어났다. 서울에 거주하던 김하락·구연영·신용희·김태원·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은 이천으로 내려갔다. 일행은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해 의병진을 조직했다. 방춘식은 초기 경기도 의병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이들은 이천 이현에 진영을 설치하고 의병진을 결성했다. 구연영은 2개대의 포수를 거느리고 양근과 지평 방면, 조성학 역시 2개대를 이끌고 광주 방면으로 떠났다. 김태원과 신용희는 안성과 음죽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노력의 결과로 구연영·조성학·신용희는 각각 300여 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의병진 조직 소식을 접한 용인·안성·수원·안산·시흥 등지에서도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김태원은 이미 조직된 민승천의 안성의병과 연합하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경기도 연합의병진인 이천수창소가 조직됐다.
조직 편제를 보면 전형적인 전투조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격장이나 돌격장 등은 다른 의병진에선 보이지 않던 직책이었다. 구체적인 편제 조직도 특징 중 하나로 주목된다. 이천수창소는 고종의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비밀조직이 전달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이춘영은 충주와 청주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했다. 전귀석은 여주의병장 심상희를 만나 장차 연합 활동을 협의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혔다.
■ 백현전투 승리... 의병진 ‘사기 충전’
이천의병은 이듬해 1월18일 일본군 100여 명과 백현전투에서 첫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의병진은 ‘복병전술’로 맞서 야산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때 상황을 김하락은 <진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을 맞아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백현으로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추격하여 백현 아래에 당도했다. 그때 갑자기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차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의 포위망에 빠져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급습하여 무찔러 적은 죽은 자가 수십 명에 달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참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첫 전투 승리로 의병진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이는 이후 의병운동을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백현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다시 공격해 왔다. 2월12일 새벽에 2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다음날 새벽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눈보라가 일어 전세는 순식간에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의병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를 포기한채 흩어졌다. 결국 일본군에 패배한 의병진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전투 패배로 인한 손실은 이천수창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을 구실로 이현 마을 전체를 무자비하게 초토화했다.
의병장들에게 시급한 현안은 잔여 의병 수습이었다. 김하락은 여주에 있는 심상희를 찾아가 군사 지원을 요청해 500여 명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구연영·신용희 등도 잔여 의병들을 수습·모집해 2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박주영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근거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 남한산성에 연합의병진을 다시 편성하다
남한산성에는 이미 심원진이 이끄는 광주의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근의병도 여기에 합세하며 연합의병진을 다시 조직했다. 연합의병진 남한산성 점령은 일본군과 개화정권에 당혹감과 더불어 위압감을 줬다. 이곳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가 비교적 풍부하게 저장돼 있었다.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1만 병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식염이 수백 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되어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즉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천연의 요새지를 근거지로 삼아 풍부한 군수물자를 갖춘 대단한 무장단체로 거듭났다. 일본 신문도 연하의병진 동향을 연일 보도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군은 친위대 1개 중대와 대포를 끌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관군은 3월5일부터 공격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연합의병진은 송파까지 추격해 관군의 대포마저 빼앗았다. 정부는 강화도진위대 병력까지 증파, 항복을 권유했다. 일본군도 증원군을 보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할 뿐이었다.
■ 원대한 서울진공작전, 그리고 실패
이때 의병진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군부대신에게 밀사를 파견해 친러정권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정부는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 병력으로 남한산성 공격을 명령했다. 이른바 장기렴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말았다.
의병진 확대와 거듭된 승리에 의병진은 서울진공작전을 모색했다. 이는 의병운동사 중 ‘최초’라는 사실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경기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 춘천과 삼남지역 의병진과 연합작전까지 구상한 점에서 주목된다. 나아가 의병운동 일체화와 더불어 국제사회에 일본의 불법성을 모색한 사실이다. 갑작스러운 남한산성 함락으로 중단된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은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 장기간 고립에 의한 군량이나 무기 부족 등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또한 지휘부 내부의 갈등이나 대립도 지적되어야 한다.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일부 의병장의 안일한 대응에서 찾아진다. 승리에 도취한 후군장 박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은 관군의 꾀임에 빠져 성문을 열어줬다. 의병진은 전투다운 전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 운동공동체임을 일깨우다
잔여 세력을 수습한 의병진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의병진은 정부군과 일본군의 끝임없는 추격을 받았으나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이미 현지에 결성된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함으로 한민족이 ‘공동운명체’임을 일깨우는 밑거름이었다. 전기 의병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경기도 의병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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