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 겸비한 민족교육... ‘구국간성’을 키우다
■ 신앙공동체가 강화인 의식을 변화시키다
강화도는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 일찍이 군사요충지이자 서해안 해상교통 중심지였다.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인천을 비롯해 이곳 선교사업에 주목했다.
1892년 조원시(George Heber Jones, 趙元時)는 김상림 가족의 열성적인 협력, 교세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박능일·김봉일 등의 ‘일자돌림신앙인’은 전도활동에 열정적이었다. 선상 세례와 신앙공동체 탄생은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는 밑거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안방에 갇혀 있던 부녀자를 해방하고 미신을 타파해 문맹한 부녀사회에 교육을 전파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은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교회는 기도처로서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이상을 논의하는 생활현장으로 탈바꿈했다.
영국 성공회도 강화도를 중심으로 종교토착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3년 7월 워너(L. O. Warner) 신부는 갑곶진에 거처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에 나섰다. 그는 고아들을 모아 영국식 기숙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점차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전통식 가옥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강화읍 성당은 주민들의 성공회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 강화도에 근대교육이 시작되다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인 사립학교는 목사 조원시와 박능일 등의 협력으로 설립한 잠두의숙(합일학교 전신)이었다. 이들은 잠두교회 내에 학교를 설립한 후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사립 잠두합일학교로 개칭과 더불어 학부로부터 사립학교 설립인가도 받았다. 교장 손승룡 노력으로 재학생은 80여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향중부로들도 적극 호응하는 등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원시·손승룡·최국현 등은 여성교육에 관심을 돌렸다. 위량면 홍천동 제일합일여학교 운영은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됐다. 발전의 기틀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내려온 김영애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1909년 4월 제일합일여학교 개편되는 가운데 교육 내실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육영학원(보창학교 전신)은 1904년 이동휘와 유경근·윤명삼 등에 의해 설립됐다. 설립 목적은 군인 자제와 일반 자제에 대한 근대교육 시행을 통한 구국간성 양성이었다. 초기 모집된 학도는 50여명에 달했다. 교과목은 본국지리·역사, 외국지리·역사, 국문, 산술, 영어, 일어 등이었다. 조희일과 김만식은 일어와 영어 명예교사로서 열성을 다했다.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구국운동은 이를 계기로 발전을 거듭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변화에 부응해 강화학파도 실리 실사(實理 實事)에 입각한 시무책을 강구했다. 시세에 부응하는 논리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이어졌다. 곧 양명학 계승·발전은 이들의 윤리규범이자 실천윤리였다. 주요 인물은 이건창·이건승 형제와 이건방·홍승헌·정원하 등이었다. 특히 이건승은 계명의숙 설립을 주도했다. 주체적인 개화·자강에 의한 자주독립은 궁극적인 목적으로 다가왔다.
하도면 여차리와 흥왕동 유지들은 보흥의숙을 설립해 50~60명을 가르쳤다. 숙장과 숙감 등은 열성을 다하는 등 면학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니산의숙은 근로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는 등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100여명을 차지하는 야학생과 학부형회의 지원 등은 당시 분위기를 방증한다.
여성교육은 합일학교와 보창학교에서 시작됐다. 이동휘는 남녀차별을 불식시키는 유효한 수단으로 여성교육에 주목했다. 그는 학부에 여학생을 위한 교사 신설을 요청하는 등 근대여성교육에 앞장섰으며 여성교육 보급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귀결됐다.
■ 강화학무회가 의무교육으로 시세 변화에 부응하다
근대교육 보급이 확산되는 가운데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는 민족교육에 집중했다. 그는 강대흠·황범주등과 주민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 시행에 적극적이었다.
군수는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한 의무교육 시행을 역설하고 나섰다. 이는 강화도 근대교육 도약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임원진은 회장 강대흠, 부회장 조상석, 총무 황범주 등이었다. 의무교육 시행방안은 생활정도에 따라 주민 부담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의무교육은 민족지도자와 교사 양성 등 긴밀한 계획에 따라 시행됐다. 보창학교 중학과와 중성학교 사범과 설치는 이를 방증한다. 또한 한문 능통자에 대한 우대책과 교사로서 양성은 현지 여건을 고려한 조처였다.
이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실천에 옮겨졌다. 면장·이장 등 교육활동에 적극적인 입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가운데 강화학무회는 ‘의무학교’ 내에 국문야학교를 운영했다. 이는 근로청소년과 문맹한 성인을 위한 의무교육 확대하려는 일환이었다.
■ 보창학교가 민족교육 산실로 자리매김하다
강화도 사립학교설립운동 특징은 첫째, 사립학교 설립은 1905년부터 활성화됐다. 병식체조와 상무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국망(國亡)에 대한 위기의식은 교과과정에 그대로 반영됐다.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체육은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장차 독립군과 민족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교사양성은 사범교육기관을 통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사립학교설립운동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운영비 확보와 교사 양성 등 중장기적인 계획 부재였다. 사립학교 설립과 달리 근대적인 교수법이나 교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는 의무교육 시행과 더불어 교육 내실화를 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나 마찬가지였다.
의무교육은 자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일제는 ‘시세와 민도’를 핑계로 이를 저지하는 데 안간힘을 기울였다. 당시 제정된 ‘보통학교령’, ‘사립학교령’, ’교과서검정규칙’ 등 각종 교육법령은 대표적인 경우다. 오직 식민정책에 순종·복종하는 ‘식민지형’ 인간을 양성하는 우민화는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강화학무회는 학구를 중심으로 보창학교지교에 의한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강화도를 근대교육운동 ‘요람지’로 진전시킨 배경은 여기에서 보인다. 보창학교지교 내 야학과 설립은 청소년들에게 보다 확대된 근대교육 수혜로 이어졌다. 당시 수강자만도 4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야학은 문맹퇴치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야학생들도 연합운동회 참가 등을 통해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병식체조를 중심으로 심신을 단련했다.
이동휘의 교육진흥책은 관내 사립학교 운영·유지로 귀결됐다. 그는 육영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의병전쟁을 지원하는 등 문무겸전에 입각한 민족교육을 시행이었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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