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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 일제강점기 탄압 아픔 ‘고양 쌍굴’
문화 G-Story

[납량특집] 일제강점기 탄압 아픔 ‘고양 쌍굴’

세월 따라 괴담도 변한다...현대 가까워지면서 괴담의 형태 변해

구미호부터 빨간 마스크까지, 소름 쫙... 괴담 무더위 싹

동서고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구전부터, 퇴적·풍화를 거쳐 기록된 문헌까지 다양한 역사가 사시사철 숨을 쉰다. 지금 경기도엔 어떤 이야기가 남고, 또 사라졌을까. 경기일보 이연우 기자와 민경찬 PD가 시나브로 잊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찾아 글과 영상으로 전한다. G스토리팀은 여름철을 맞아 네 번째 테마로 ‘납량특집’을 선보인다. 이번 특집은 경기일보 홈페이지를 통해 생동감을 더한 인터랙티브형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주]

* G-STORY 인터랙티브 기사(클릭)

괴담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만국 공통 ‘저승사자’가 주인공일 때부터 지역별 ‘학교 공동묘지 전설’이 쏟아지게 될 때까지, 세월 따라 무서움의 대상이 변하면서 괴담 역시 달라져왔다.

옛날옛적 우리나라에선 비현실적인 존재와 비일상적인 공간이 괴담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현실적이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은 각종 미지의 것들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줬다는 의미다.

그렇게 탄생한 허구의 존재가 바로 도깨비·구미호·장산범 등이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가 흉가·동굴·우물 등에 나타나 저주를 부르거나 죽음을 이끈다는 식의 내용이 많다.

이러한 괴담이 생겨난 배경은 의외로 단순 명확하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가상의 존재를 통해서라도 곤란함을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사회 풍토가 개인의 개성보단 집단의 통일을 우선시 했던 만큼, 타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고 마을에서 버려질 바엔 ‘헛것’의 핑계를 댔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을 보고 놀라서 벌인 일’, ‘귀신이 일으킨 일’ 등을 명분 삼아 괴담을 만들어내며 나와 남의 소속감을 키웠다는 게 한국민족문화학계의 설명이다.

더욱이 과거 기술력이 지금과 같지 않아 구전(口傳) 이야기의 진위를 증명해 낼 길도 없었고, 종교적 위치에서 무속신앙이 가졌던 힘도 컸기에 이러한 괴담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괴담의 형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이나 일제강점기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새로운 공포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 특정 사고, 특정 인물처럼 ‘눈에 보이는 분명한 사실’이 허구보다 무섭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를 기점으로 자유로귀신이나 빨간마스크 등 지역별 구체적인 괴담이 태어났다.

오늘날 경기도 지역엔 어떤 괴담들이 숨어 있을까.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G스토리팀은 ‘수탈’의 공포가 물든 ‘화전 쌍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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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쌍굴 인근에서 지낸 세월만 40년인 이주원 씨(77)는 우리를 굴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굴 벽면에 셀 수 없이 많이 남겨진 탄흔. ‘경성조차장 제3공구 내 무연고 합장지묘’라고 적힌 묘비석. 조주현기자

등골 서늘한 괴담엔... 이름도 없이 스러진 선조들의 恨이

폭우가 내리고 축축함이 낮과 밤을 덮은 어느 여름날. 송글송글 빗방울이 묻은 무성한 잡초 사이를 헤치고 ‘그 곳’에 다다랐다. 열대야 속에서도 유독 서늘함이 느껴지던 입구는 사람의 출입을 막겠다는 듯 높다란 10개의 철제 패널로 막혀 있었다.

철판 가장 왼편 끄트머리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을만한 약간의 틈이 보였다. 안으로 발을 내딛자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캄캄한 어둠뿐. 손에 쥔 빈약한 플래시 하나로는 도저히 ‘그 곳’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인근에서 조금 더 큰 손전등 하나를 빌려 다시 입장. 바닥에는 언제 설치됐는지 알 수 없는 철로가 길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쓰레기도 가득했다. 감귤로 만든 막걸리 캔부터 주인 모를 신발 깔창 하나, 플라스틱 일회용 숟가락과 쥐의 사체까지. 악취가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초코파이다. 포장지에 적힌 소비자가격은 200원. 동양제과㈜가 만들었다고 한다. 동양제과㈜가 오리온으로 사명을 변경한 게 2003년이었으니 적어도 20년 전에 버려졌으리라. 인적이 끊긴 지 한참 됐음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쓰레기를 뚫고 저벅저벅 한 걸음씩 나아가자 서서히 발등이, 발목이, 종아리가 젖어들었다. 차갑고 더러운 습한 흙탕물에 찝찝함이 마냥 커졌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철로도 점점 잠겨 제 모습을 감추는 통에 살금살금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방울마저 불규칙하게 똑똑 떨어지며 음산함을 높이던 그때, 저 멀리 입구에서 “거기 누구냐”고 묻는 고성이 들렸다.

■ 소문 무성한 ‘금단의 구역’

‘여기’는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 대덕로 52-19번지 일대. 과거엔 ‘화전 쌍굴’로 불렸지만 지금은 ‘고양 쌍굴’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 터널에 있는 100여m의 상(上)굴과, 아래 골짜기 옆 터널에 있는 200여m의 하(下)굴을 합쳐 쌍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직선 형태인 상굴은 현재 차량 및 사람의 통행이 가능한 반면, 곡선 형태의 하굴은 모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수십년 전 ‘쌍굴’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다는 이주원 씨(77)를 만났다. 그가 쌍굴 인근에서 지낸 세월만 40여년이다.

“내가 1984년도? 아니, 1983년도에 이사 왔는데 그때 저기 아래(하굴)가 우범지대였다고. 지금은 근처에 흙이 덮여서 밭농사도 짓고 그렇지만 아직도 밑에는 철로가 그대로 있어. 예전엔 그 옆에서 젊은 불량배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몰라. 허구헌 날 담배 피우고 본드 불고... 아주 말도 못 했어. 근데 그보다 더 전에는 훨씬 무서웠지. 나도 거기 안 간지 벌써 10년이 넘었네.”

이어서 그가 되뇌었다. “옛날에 거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 10여년 전에도 누가 사고로 죽었다나 어쨌다나. 불량배들이야 쫓아내면 그만인데...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무서워서 못 가지.”

■ ‘조선의 한(恨)’ 쌍굴에 깃들다

‘사람이 많이 죽었던’ 여기는 어떤 곳일까. 쌍굴의 탄생 배경을 알 필요가 있었다.

1940년대 초 지어진 고양 쌍굴은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물자를 빼앗을 목적으로 세웠던 ‘경성수색조차장’의 조성 일환에서 함께 설치된 굴이다. 보리쌀 같은 식량이나 석탄 등 군수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열차건 사람이건 이동이 편한 터널이 필요했고, 그게 지금의 쌍굴이 됐다. 과거엔 상굴과 하굴이 X자로 겹쳐져 파주 문산을 넘어 북한 신의주, 중국 만주까지 물자를 옮겼다고 한다.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히 강제 노역에 동원됐던 ‘조선인’이다. 당시 노역에 동원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여전히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존재도 있다. 당시 노역 중 죽음을 맞은 이들도 있는데, 실제로 쌍굴에서 북서쪽으로 1.2㎞쯤 이동하면 이들이 묻힌 묘지를 볼 수 있다. 경성수색조차장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본의 전범기업 하자마구미(간조·間組)가 공사에 동원했던 무연고자의 유해를 이곳 공동묘지(화전동 663-9번지)에 이장했다. 현재 묘지에는 함자(銜字) 대신 ‘443’, ‘463’, ‘728’ 등의 번호만 적혀있다.

고양시는 일제의 탄압 속 이름조차 없이 스러진 선조들을 기억하기 위해 지난 2019년 11월 이곳을 ‘일제강점기 화전동 무연고 합장 묘역’으로 지정하고 ‘화전동 기림의 길’ 등을 세웠다. “강제 노역과 징용으로 희생된 선조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 역사의 무게를 후대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며 고양 쌍굴과 함께 이곳을 역사적·문화교육적 현장으로 키운다는 것이 시의 구상이다. 여기에 한국철도공사도 힘을 보태 쌍굴의 역사적 활용방안과 타당성 등 용역을 시행하기로 했다. 2년여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은 없지만 추후 ‘쌍굴 역사공원’이 들어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괴담 속 진실... “슬픈 역사 알려야”

탄압과 수탈의 장소에서 고통 속 죽어간 조선인의 모습은 쌍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단 상·하굴 벽면에 셀 수 없이 많이 남겨진 탄흔만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나마 상굴은 화사한 벽화와 밝은 조명이 아픔을 가리고 있지만, 하굴은 언제나 캄캄하고 외롭다.

그래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누군가 우는 소리가 났다’거나 ‘군복 입은 남성이 보인다’거나, ‘얼마 전에 사고가 나서 누가 죽었다던데’ 등 괴담을 언젠가 한번씩 들어봤다면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못한다.

“하굴에 지금 오리 가족이 살아요. 뱀장어도 있고, 개구리도 있고, 뭐가 되게 많이 살아서 물이 참방참방 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그런데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다른 것도 많을 거야. 억울한 장소잖아. 사람이 죽었던.... 심지어 그런 얘기도 있어. 하굴 중간쯤 가면 오른쪽 귀퉁이에 엄청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거기 잘못 빠지면 나오질 못한다고. 누가 발목을 붙잡는다고. 내가 그런 얘기를 들었어. 그러니까 하굴 들어가더라도 절대 거기는 가지마. 얼마나 무서워? 나는 절대 안 가”.

하굴 옆에서 농사장비와 가재도구를 정리하던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런데 이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름돋는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잖아. 조금 더 알려져서 후대 아이들한테 ‘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 하고 알리는 그런 이야기지. 하굴에도 ‘총탄 그림’ 같은 벽화 좀 넣고, 닫았던 문도 개방하고, 역사체험관광 같은 걸 해서 근처 하남이나 서울에서도 찾아오게 하고. 그런 식으로 고양 쌍굴이 알려지면 좋겠어.”

G스토리팀=이연우·조주현기자,민경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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