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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6.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 자신감 일깨운 ‘여성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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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6.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 자신감 일깨운 ‘여성단체’

“나라빚 청산에 남녀 따로없어”...패물·곡식까지 多 끌어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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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 나랏빚 청산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김광제·서상돈 등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순식간에 국내외로 파급됐다. 계몽론자와 전·현직 관료 등은 국민운동으로 승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국채보상소(회) 조직과 아울러 ‘취지서’ 발표는 주민들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요인이었다.

여성들도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남성 주도의 국채보상운동 전개에 격분한 여성들은 곧바로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군민대회가 열린 직후 대구에서는 정운갑모친 서씨(서채봉), 정운화처 김씨(김달준), 서석균처 최씨(최실경), 서학균처 정씨(정말경), 서덕균처 이씨(이덕수), 김수원처 배씨(미상) 등 7인은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격문을 통해 “경고 아 부인동포라.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閨門)에 처하여 삼종지도(三從之道) 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담배를 아니 피우고 그 돈을 모은다고 하오니 즉시 사람으로 흥감하게 할지요. 진정에 아름다움이라. 그런데 부인들을 논외로 한다 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오”라며 남성 중심에 의한 국채보상운동을 비판하고 나섰다. 논리는 남녀평등론에 의한 사회적인 존재로서 역할 분담과 국민으로서 의무임을 주장했다.

소식을 접한 여성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진주 기생 부용·국향·난초·앵무 등은 진주국채보상부인회 활동을 지원했다. 이들은 취지서를 통해 부인들 참여를 자발적으로 유도하는 등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서울 대안동 국채보상애국부인회를 주도한 신소당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활동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 인천지역 여성들이 국미적성회를 조직하다

인천인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결코 예외적일 수 없었다. 신상회사 임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연동맹회는 정재홍(鄭在洪) 주도로 이뤄졌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널리 확산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외세 침략에 대한 경각심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인천들에게 국채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는 교육현장이었다. 사환들에 대한 입회 권유는 노동자 참여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유도하는 촉진제였다. 이에 권업사·미상회사·신상회사 임직원은 물론 제령학교 생도 90여명도 동참했다.

분위기는 여성들에 의한 조직적인 모금운동으로 이어졌다. 국미적성회(掬米積誠會)는 인천지역 기독교 부인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조직됐다. 1907년 3월29일 주요 발기인은 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스터·장마리아 등이었으며 초기 회원만도 80여명에 달하는 등 부인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이 중 선발된 권고위원 20명은 2명씩 1개조로 편성했다. 이들은 각각 동리를 맡아 여성들 동참을 권고하는 등 여론 조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권고위원은 매주 의연한 곡물을 수합했다. 활동 1개월만에 회원은 500여 명으로 급증하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1개월 동안 의연미는 18섬 8되 8홉, 동화는 254원 36전, 1냥중짜리 비녀 2개가 모였다. 국미적성회 활동은 ‘차회(此會)가 승어단연회(勝於斷煙會)’라고 평할 정도로 당대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사회활동을 통한 여성들 스스로에 의한 지위 향상은 물론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인천 일대 의부(義婦)와 열녀가 밥 먹을 때마다 음식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모았다가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또 다시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권면하고 인도하기를 마치 거지가 구걸하는 듯이 한다. 길에서 서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무어라 말하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모두 국채보상이라 하고 그 안색을 보면 당황하는 모습이 쫓기는 사람과 같다.

■ 경기도 여성들이 호응하다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김포군 검단면 고잔리에 거주하는 한씨·노씨·김씨 등은 국채보상의무소를 조직했다. 이들은 각 동리를 방문해 취지서를 배포하는 동시에 부인들 동참을 권유했다. 취지서 주요 내용은 ‘충효의 윤리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고 국채보상은 국가 흥망과 직결됨’을 강조했다. 나라가 위급한 때에 부인들이라고 편안하게 있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일임을 지적하는 등 애국심을 일깨웠다. 출연 방법은 돈만 의연할 것이 아니라 패물은 물론 곡식까지 출연함을 강조했다. 이는 경제적인 곤궁 속에서 전개되는 국채보상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일환이었다.

여주군 근동면 흔바위 개신교인 여성 단체적인 성격을 띠고 참여하는 등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참여자는 ‘흔바위 예수 믿는 김씨 부인 50전, 고씨 부인 20전, 조씨 부인 40전, 류씨 부인 40전, 권씨 부인 20전, 김씨 부인 10전, 박씨 부인 10전’ 등이었다. 비록 구체적인 단체 명칭은 알 수 없으나 기독교회를 통하여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인 역할에 소홀하지 않았다.

화성군 화척지면 보흥여학교 교사 이리사벳안· 찬성원 신덕김·미시다홍·이뱃가홍과 학부모·학생 등 33명은 9원71전5리를 모았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들이 일제침략 실상을 인식하는 소중한 계기였다. 김희경·김혜경·안마리아 등은 부인의성회를 조직해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 활동은 여성의 사회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초래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했다. 이는 여성교육회로 전환하는 등 대한제국기 화성지역 여성교육을 확산시켰다. 가정부인 참여는 학생과 유대를 강화하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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