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여성들, 침묵 깨고 역사무대로 나오다
■ 지역 독립운동 이끈 ‘여걸 중의 여걸’
3·1만세운동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해 한민족이 혼연일체가 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유사 이래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에 부응한 움직임이었다.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타오른 불꽃은 순식간에 국내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파급됐다.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한민족의 존재감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울·평양·원산 등 7곳에서 시작된 도도한 흐름은 너무나 장엄하고 숭고했다. 일체화와 대중화는 소통으로 운명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생활 현장과 접목됐다. 개성에선 이미 독립선언서가 전달됐으나 목사와 전도사 등 남성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여성으로 직접 만세시위를 이끌어낸 주인공은 전도사 어윤희와 교사 권애라 등이었다. 어윤희는 독립운동사에서 개성지역의 자존심을 살린 선각자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여걸 중의 여걸’이었다.
■ 기구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다
어윤희는 1880년 6월20일 충북 충주군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자문’과 ‘대학’까지 가르칠 정도로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특히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며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강조했다. 어린 소녀 가슴에 깊은 여운과 아울러 평생의 좌우명이 됐다.
행복한 생활은 소망과 달리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유명을 달리했다. 신혼의 단꿈도 3일 만에 끝났다. 천애 고아이자 청상과부로 ‘버림받은’ 존재였다. 삶에 대한 허무로 정든 고향을 떠나 나이 서른에야 겨우 개성에 정착했다. 남감리회 전도사업의 중요한 근거지이자 중심지는 바로 개성북부교회였다. 어윤희는 세례를 받고 미리흠여학교와 호수돈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다. 전도부인으로 산간벽지 교회에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하는 강고한 인습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 개성 3·1만세운동의 주춧돌을 놓다
3·1만세운동은 역사 무대 뒤편에서 소외된 집단들이 역사적인 전면에 나서는 계기였다. 여성들이 민족운동 주체로서 나선 결정적인 시점은 바로 만세운동 현장이었다. 여성들의 활약상은 여학교 단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개성지역은 어윤희와 권애라 등 기독교인과 여학생들의 주도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양상이었다.
2월28일 독립선언서 100부는 개성에 도착했으나 주민들에게 배포되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사람은 유치원 보모 권애라였다. 그녀는 곧바로 어윤희를 찾아가 배포할 방안을 논의함으로써 예배당 지하실에 숨겨뒀던 독립선언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았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부한 후 보따리 장사로 가장해 인근 마을에도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어 여자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인쇄와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 등을 만들었다. 거사일은 3월3일 오후 2시로 정했다.
■ 만세운동으로 여성들의 사회적인 존재감을 알리다
기도회를 마친 일행은 어윤희를 선두로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이들은 ‘찬미가’와 ‘독립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민들도 가세해 시위군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고종 인산일로 서울의 침울하고 조용한 분위기와 달리 개성지역은 만세 함성으로 천지를 뒤흔들었다.
어윤희는 숙소에서 식사를 하던 중 곧바로 일제 경찰에 끌려갔다. 그녀는 형사들에게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며 당당한 자세였다. 심영식(세례명 심명철)은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도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호소로 만세를 부른 것뿐”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일제 경찰에게 여성들은 피의자가 아니라 성폭력과 성희롱 대상자일 뿐이었다. 나체로 짐승처럼 기어 다니게 하고 이를 보면서 희롱하며 폭행을 일삼았다. 갖가지 고문으로 정신을 잃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옥중투쟁으로 운명공동체임을 일깨우다
개성 만세운동 주역들은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방에 수감됐다. 3·1만세운동의 ‘아이콘’ 유관순을 비롯해 수원 기생 김향화, 파주의 구세군 부교 임명애 등과 함께 하는 옥중생활이었다. 혹독한 고문과 동시에 성적인 학대, 민족적인 멸시 등은 모멸감을 넘어 정체성마저 뒤흔들었다.
일제의 무도한 탄압과 모진 악형도 독립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2월 말부터 어윤희 등은 ‘통방’이라는 비밀 연락망으로 여옥사 전체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3월1일 오후 2시 8호 감방에서의 신호로 감옥 안은 만세소리가 여기저기에 터져나왔다. 유관순과 신명철은 주모자로 지목돼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 후유증으로 9월28일 순국했으며 어윤희는 1년 이상 투옥 후 1920년 4월28일 출감했다.
한편 세브란스병원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는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찾았다. 수감자들과 면회한 뒤 온갖 고문과 악형 등 처절한 실상을 미국 선교본부로 보냈다. 어윤희와 면담에서 옥중 고난과 저항 소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의남매’라는 인연을 맺는 등 신뢰감을 안겨줬다. 그는 여성 투사들의 옥중 수난과 투쟁활동을 ‘꺼지지 않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으로 기록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 여권 신장과 사회적인 약자를 보살피다
만세운동 이후 ‘여성개조론’에 입각한 여성운동이 본격적인 시발점을 알렸다. 개성의 여성들은 개성여자교육회를 만들었다. 어윤희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등 열성을 다했다. 투철한 항일투쟁의식과 남을 배려한 희생정신은 어윤희를 여성투쟁가로서 존재감을 알리는 계기였다. 어윤희는 전도부인으로서 여성들 민족의식 향상과 여성 교육에 힘썼다.
근우회 개성지회는 1929년 6월15일 만들어졌다. 어윤희는 개성여자교육회를 근간으로 이 단체를 출범시켰다. 목표는 봉건적 굴레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진정한 여성해방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따라 호수돈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여학생들은 경찰에 구속됐다.
근우회 해소 이후 어윤희는 민족운동단체에서 물러나 아동복지 활동에 헌신했다. 중일전쟁 발발에 즈음해 개성 유지들의 도움으로 공설운동장 부근에 ‘유린보육원’이란 보육원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중 어윤희는 남쪽으로 피란와서 1952년 마포 서강감리교회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하는 등 약자에 대한 보살핌을 이어갔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