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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4. 경기도 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말하다
문화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4. 경기도 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말하다

서울 근방 침략의 최전선道, 항일운동 중심지 ‘우뚝’

■ 인문지리적 조건이 사회·경제·문화 발전의 토대가 되다

경기도는 행정구역상 서울을 제외한 근방 지역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중앙정부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떤 부분은 서울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반면 어떤 문제는 서울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한국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 변화와 밀접한 관련성은 경기도의 근교 도시 발전과 더불어 역사 발전에 중요한 거점이 됐다. 인천 시흥 과천 수원 개성 광주 고양 양평 의정부 등지는 한국사 발전이나 정변‧전란 등이 있을 때마다 관계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개성 수원 인천 등지는 다른 배후지역보다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발달한 고장이었다. 강화도와 인천은 출입구로 일찍이 서구 문물이 유입되는 주요한 통로였다. 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계지 설정은 ‘침략의 최전선’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항일독립운동사도 그대로 반영됐다. 서울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 기관은 항일독립운동 세력의 궁극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경기도에 소재한 항일세력을 중심으로 이러한 목적을 수행한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 조건도 경기도를 항일운동 중심적인 위치에서 역할을 하게 했다. 항일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근대민족운동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계승하는 밑거름이었다. 실학은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와 개혁사상을 아우러는 근대성을 지닌다. 이는 성호 이익(안산 출신)과 다산 정약용(양평 출신) 등 근기학파에 의해 개혁적인 근대사상으로 접목됐다.

항일운동의 선구적인 지도자 배출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주의 선구자 김택영 이건창 등과 교육계몽운동 및 기호흥학회를 이끈 수많은 인사들이 이곳 출신이었다. 독립협회 지회인 인천 박문협회는 이곳뿐만 아니라 경기도 교육계몽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지회나 개성교육회 등도 근대의식을 각성시켰다.

의병전쟁에서 강기동 김수민 민긍호 연기우 등은 반봉건적 의병장이었다. 이와 달리 구시대적 위정척사 사상에 기초한 인물도 있었다. 이항로 학통을 계승한 최익현 이춘영 이필희 심상희 이인영 등은 전통 유교에 기반을 둔 의병장으로 독립운동사를 빛냈다. 유교 의리의 모범으로 자결 순국한 이한응 조병세 민영환 홍만식 등은 국운에 따라 온몸을 민족제단에 기꺼이 바쳤다.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조소앙 형제들, 여준 여운형 신익희 박찬익 안재홍 이봉창 조봉암 등은 다양한 이념으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합법과 비합적인 활동은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 경기도는 항일운동의 선구이자 중심지다

서울에서 전개된 항일운동은 경기도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뤄졌다. 일제의 식민정책 변화에 민감해 다른 지역 반응과 매우 달랐다.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은 경기도를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서해안이나 임진강‧북한강‧남한강의 수로가 발달했다. 서울과의 연결이나 경기도와의 정보 교환이 매우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같은 배경은 의병전쟁이나 근대교육운동‧계몽운동 등이 일찍부터 활발하게 일어나는 요인이었다.

통감부나 조선총독부에 대한 공격은 의병전쟁에서 시작됐다. 다른 지방의 의병부대는 지방 관아나 일본군의 지방 주둔군을 상대로 싸웠다. 반면 이천수창의소에서 시작된 의병부대는 남한산성에 웅거하며 서울 진공작전을 세웠다. 서울에 소재한 각국 공사관에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상세하게 알렸다. 유홍석의 가평의병도 서울 진군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초기 의병부대가 해산된 뒤 각지로 해산한 일부 의병은 러일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방해하고자 전신선 절단을 감행했다. 군대 해산 이후 양주에 집결한 13도창의군은 선봉장 허위를 필두로 서울 진공작전에 나서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다. 이듬해 1908년 5월 임진강에서 활동하던 허위‧연기우 의병부대도 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했다.

의병전쟁 등으로 항일의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농민들도 구국운동에 동참했다. 1904년 9월에는 경인선과 경부선 부설로 많은 피해를 입은 시흥군 농민들은 서울로 진격하려다 봉쇄 당한 일도 있었다. 당시 농민들의 저항은 김포 용인 파주 장단 가평 등지로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 국채보상운동에서 아낙네의 존재감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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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여성국채보상운동단체비에 적

힌 여성국채보상운동단체 목록

사회 변화에 부응하려는 인식은 여성들 스스로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인천 국미적성회(掬米積誠會)는 인천지역 기독교 부인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조직됐다. 발기인은 박우리바, 여누이사, 정혜스터, 장마리아 등으로 초기 회원만 80여명에 달했다. 선발된 권고위원 20명은 2명씩 1개조로 편성해 여성들의 동참을 권고하는 등 여론 조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포군 검단면 고잔리에 거주하는 한씨, 노씨, 김씨 등은 국채보상의무소를 조직한 후 각 동리를 방문해 취지서를 배포했다. 주요 내용은 ‘충효의 윤리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고 국채보상은 국가 흥망과 직결됨’을 강조했다. 나라가 위급한 때 부인들이라고 편안하게 있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일임을 지적하는 등 애국심을 일깨웠다. 출연 방법은 돈만 의연할 것이 아니라 패물은 물론 곡식까지 출연하자고 설득했다. 이는 경제적인 곤궁 속에서 전개되는 국채보상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일환이었다.

여주군 근동면 흔바위 개신교도 여성도 단체적인 성격을 띠고 참여하는 등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참여자는 ‘흔바위 예수 믿는 김씨 부인 50전, 고씨 부인 20전, 조씨 부인 40전, 류씨 부인 40전, 권씨 부인 20전, 김씨 부인 10전, 박씨 부인 10전’ 등이었다. 비록 구체적인 단체 명칭은 알 수 없으나 기독교회를 통해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인 역할에 소홀하지 않았다.

화성군 화척지면 보흥여학교 교사 이리사벳안, 찬성원 신덕김, 미시다홍, 이뱃가홍과 학부모 및 학생 등 33명은 9원71전5리를 모았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들이 일제 침략 실상을 인식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김희경, 김혜경, 안마리아 등은 부인의성회를 조직해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 활동은 여성의 사회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초래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했다. 이는 여성교육회로 전환하는 등 대한제국기 화성지역 여성교육을 확산시켰다. 가정부인의 참여는 학생과 유대를 강화하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 부문별 항일운동을 견인하다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을 거쳐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부문별로 분화‧진전되는 가운데 다양하게 전개됐다. 학생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신간회운동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개성 수원 인천 등은 항일운동을 이끄는 중심지로 부상했다. 3‧3개성만세운동과 수원 구국민단은 여성 항일 의지의 ‘상징’이 됐다. ‘조선인 본위 교육’을 요구한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은 민족교육과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중심 단체였다. 특히 여성운동은 여성들의 자아를 각성시키는 촉매제와 같았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을 창출한 공간도 경기도였다. 일제 침략에 맞선 갑오농민군 활동은 배일적인 민중의식을 일깨웠다. 각지에 설립된 계몽단체 지회는 강연회를 통해 공화주의와 근대적인 사상을 널리 알렸다. 3‧1운동을 거쳐 보편화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아나키즘(자유주의)과 사회주의 유입은 대중운동을 진전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1940년대 건국동맹이나 농민동맹 활동은 멈추지 않은 경기도 항일운동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광복 직전 조문기 등 대한독립청년단의 부민관 폭파 의거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항일운동이 치열한 경기도에 대한 일제의 잔인한 반격으로 피해도 엄청났다. 의병전쟁의 중심지는 마을 전체가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3‧1운동의 제노사이드로 널리 알려진 제암리학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상황에도 경기인들은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의 끈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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