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1. 삼일운동·고려혁명당 이끈 인암 홍병기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11. 삼일운동·고려혁명당 이끈 인암 홍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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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판사 앞에서 당당…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 할 것”
일본에 망명했던 시기의 의암 손병희. 얼굴을 가리는 용수를 쓰고 법정으로 끌려가는 독립지사들.
일본에 망명했던 시기의 의암 손병희. 얼굴을 가리는 용수를 쓰고 법정으로 끌려가는 독립지사들.

1919년 3월13일 경무총감부 순사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51세의 천도교 장로 홍병기를 심문했다.

“이번 조선독립운동을 하게 된 전말을 자세히 말하라”
“일본이 합병 이래 우리 조선민족을 압박하고 교육에 차별을 두는 것 등에 불평이 있었는데 이번 우리 동지들이 민족자결의 제창에 자극되어 조선독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런데 올 2월 10일경 친구 권동진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만났을 때,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이 제창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도 독립을 기도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권동진도 찬성했다…”

한 달이 지난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본인 판사가 심문했다.
“피고는 왜 이 기회에 조선독립을 계획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나”
“원래 조선은 4천년 역사가 있는 나라로, 하루아침에 남의 영토가 된 것을 나는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때 민족자결이란 문제가 제창됨에 따라 이때에 독립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피고는 일본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품고 있는가”
“불평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점차 조선 민족을 망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인에 대해서는 권리라든가 대우를 해주지 않고 또 교육의 정도가 일본보다 낮은 식민지 교육을 하고 있다”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다
홍병기(洪秉箕)는 1869년 여주군 이포리에서 태어났다. 참봉 벼슬을 한 아버지 홍익룡은 양반의 서자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건강했던 홍병기는 일찍부터 한학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해 19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름만 남은 군대에서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홍병기는 24세에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놀라웠다. 자신의 여종을 해방시켜 며느리로 삼고 딸로 삼아 신분 차별을 없앴던 최수운과 베를 짜는 며느리를 하느님이라고 선포한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은 의식을 개벽시켰다. 여주에서 포교활동을 열심히 벌여 능력을 인정받고 접주에 임명됐다. 1893년 봄의 보은집회와 이듬해에 벌어진 갑오동학혁명은 홍병기에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1894년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이 동학교도들을 총동원 하는 기포령을 내렸다. 홍병기도 여주에서 기포해 수십명의 교인들을 이끌고 경기도 편의장 이종훈의 지휘를 받으며 통령 손병희가 이끄는 부대에 합류해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동학군은 무기력했다. 홍병기는 결국 손병희, 이종훈 등 지도자들과 함께 스승 최시형을 모시며 관군과 민보군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1898년 해월 최시형이 관헌에 잡혀 처형됐다. “나 죽은 후 10년 안에 장안에 동학의 주문이 울려 퍼지게 하라”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홍병기도 탄압의 중심지 서울에 잠입해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 동학의 근대화 활동과 갑진개화운동에 앞장서다
해월 최시형이 순교한 후 동학교단이 도통의 전수 문제로 분란에 빠졌을 때 홍병기는 의암(義庵) 손병희를 적극 지지했다. 서자로 자랐으나 당당하고 사려 깊은 손병희의 인품을 높이 샀던 것이다. 손병희의 집안일을 돌볼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그는 1900년에 편의장과 대정(大正)에 임명되고 인암(仁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홍병기는 자신의 누이 홍영을 해월의 맏아들 최동희와 혼인시키고 어려움에 처한 스승 해월의 사모와 둘째아들 동호를 돌봐주었다.

1901년 봄, 동학교단 조직의 재건과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고민하던 의암 손병희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포교에 힘을 쏟으며 교단을 지도하던 홍병기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동학교도의 자제 중에서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보내는 일을 수행하기도 했다. 1904년, 손병희가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민회(民會)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홍병기는 동학 지도자들과 협의해 민회의 명칭을 ‘대동회’로 정하고 수십만 동학교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단발하는 ‘갑진개화운동’을 선두에서 벌여나갔다. 그러나 그 해 말 이용구가 이끌던 진보회가 친일단체 일진회와 통합한 후 친일로 돌아섰다. 홍병기는 이러한 사정을 손병희에게 알리기 위해 이종훈과 함께 동경으로 건너갔다. 1905년 12월,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명칭을 바꾸고, 이듬해 1월 귀국하여 일진회 이용구를 비롯한 지도자 62명을 파문시키며 교단 재정비에 나섰다.

이때 대종사장에 임명된 홍병기는 의암을 보좌하며 교회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포교에 전념했다. 오랫동안 지하에서 활동하던 동학의 조직에 천도교란 새로운 옷을 입히니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천도교에 입교해 순식간에 신도 수가 1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어느덧 홍병기는 천도교의 장로로서 정책을 결정하고 교인을 동원할 수 있는 핵심 지도자가 됐다.

1919년 2월25일, 홍병기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의 추진상황을 듣는 자리에서 천도교 대표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7일, 홍병기는 이종훈이 맡긴 도장을 가지고 김상규의 집으로 가서 기독교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건의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만해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출동한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15인의 동지와 함께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다. 15인의 천도교 민족대표들 중 9인이 동학혁명에 참여한 동지들이었다. 형량은 짧았으나 민족대표 33인 중 두 사람이 옥사할 정도로 감옥살이는 혹독했다.

와세다대학 재학시절의 최동희(왼쪽)와 고하 송진우(오른쪽).
와세다대학 재학시절의 최동희(왼쪽)와 고하 송진우(오른쪽).

■ 만주로 망명 ‘혁명운동’에 나서다
1921년 11월 4일에 출소해 잠시 몸을 추스른 홍병기는 교회의 혁신 활동에 뛰어들었다. 3ㆍ1운동으로 교단 원로들이 수감되어 있던 3년 동안 행정을 맡았던 인사들이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던 것이다. 홍병기는 이종훈, 오지영, 최동희 등과 뜻을 같이했다. 홍병기의 발걸음은 교단의 개혁에만 머물지 않았다. 1922년 7월 14일, 홍병기는 자신의 집에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천도교연합회의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조직한 고려혁명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에 홍병기가 추대됐다. 홍병기는 해월의 맏아들이자 외교부장인 최동희와 고려혁명위원회를 통해 조선의 독립과 사회혁명의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최동희는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자 연해주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과 사회혁명을 전개했다. 1926년 4월 5일, 길림성에서 양기탁을 비롯한 정의부의 주요인사들, 조선 형평사 오성환 등 핵심인사들, 최동희를 비롯한 천도교연합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고려혁명당을 창당했다. 최동희가 고려혁명당 창당일을 4월 5일로 잡은 것은 최수운이 인내천주의와 평등주의를 추창한 동학을 창도한 날이기 때문이다. 계급타파를 부르짖던 형평사와 천도교혁신파의 연대는 강고했다. 창당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 우리들의 인간 실생활의 적, 계급적 기성제도 및 현존조직 일체를 파괴하고 물질계와 정신계의 자유, 평등과 이성적인 신사회를 건설한다. 2.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에 우리들은 공명하고 각 피압박 민족의 결합과 통일전선 구축에 보조를 취한다”

최동희가 고려혁명당 창당 사실을 동지를 국내로 파견하여 홍병기에게 알려오자 홍병기도 당에 가입하고 신변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말에 고려혁명당의 핵심 간부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직의 전모가 밝혀져 1927년 1월에 만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같은 달 말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끼던 최동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홍병기는 크게 상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판이 진행되던 동안 음식물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크게 고통을 받았다. 징역 2년형을 받은 홍병기는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에 가출옥한 홍병기는 서울 재동의 자택에서 요양하며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아들 홍인섭이 1930년 국치일(8월 29일)에 시내에 항일 격문을 붙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광복 후 노구를 이끌고 삼일동지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홍병기는 1945년 12월, 삼일동지회의 일원으로 독립촉성선서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우가 연합할 것을 제안했다.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활동도 의욕적으로 벌이던 홍병기는 1949년 1월 26일,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치료하던 중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62년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홍병기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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