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광주 '남한산성'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광주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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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산세 활용한 군사적 요새이면서...행정의 중심지로 유사 시 임시수도 기능
축성시기·주체 놓고 백제·신라 주장 분분, 병자호란 삼전도 굴욕 처참한 역사 현장
이후 천주교 박해로 신자 300여명 순교...행궁은 일제강점기 때 방화로 터만 남아
성벽 1975년, 행궁은 2002년 복원 시작

1636년 12월1일, 중국 땅의 청나라 제2대 임금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왔다. 조선의 용장으로 알려진 임경업 장군이주둔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바로 한성쪽으로 진군했고 임경업 장군의 장계는 12일에 왕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 날 청군이 평양까지 진군했다는 장계가 다시 올라 왔다. 조정에서는 급하게 세자빈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파천시켰다. 조선의 임금 인조와 세자는 뒤따라 강화도로 가기로 했는데, 그 시각 청군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 섰다는 탐색병사의 보고를 받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인조는 남한산성속으로 파천했다. 이 때 산성주변의 관리들이 산성안으로 모여 들었고 병력은 1만3천여명, 식량은 50일 분 정도가 전부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시강원의 대사간 정지호의 남한일기… 치욕의 역사지만 교훈으로 삼아야만

청군이 남한산성에 처음 당도한 것은 12월16일, 이런 상황에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왕조의 조정은 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와 항복하자는 주화파의 극심한 갈등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청 태종은 해가 바뀌자 군사를 12만명으로 늘려 남한산성 아래 쪽 탄천에다 진을 크게 치고 조선왕조를 강렬하게 압박했다. 청군과 대항한 각 지역의 전투는 승전보 보다는 참패한 내용이 계속 전해졌고 군사들은 지쳐서 탈진상태가 됐다는 보고가 계속 들려 왔다. 혹독한 추위와 눈바람을 이겨 내야 하는데, 식량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강화도마저 함락돼 세자빈과 왕자들이 포로가 됐다는 비보까지 접하게 됐다. 전황은 막다른 지경까지 왔는데, 청나라의 ‘용골대’와 ‘마골대’ 두 장수는 성문까지 와서 인조의 출성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없었던 인조는 산성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인조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대사간(大司諫) 정지호(鄭之虎)의 ‘남한일기’ 47일간의 기록이다. 일기는 계속된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신하 50여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뒤를 따랐다. 뒤따른 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다. 임금이 산을 내려 온 조금 뒤에 갑옷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명이 달려 왔다. 임금은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다섯 사람과 한림원 주서 각 한 사람, 세자는 시강원과 익위사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삼전도로 향해 나아갔다. 삼전도에는 청태종의 수항대가 설치됐고 인조는 이곳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닿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1636년 병자호란은 전쟁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그 부인이 볼모가 돼 청나라로 잡혀 가게 됐고 조선은 해마다 금은보화와 수많은 물품을 조공해야만 했다. 게다가 무고한 백성 60만명이 끌려가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됐다. 참으로 처참한 역사의 기록이다. 후손들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남한산성, 한양의 보장처이자 적군의 방어선… 유사시 임시수도의 기능까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에 이르며 산위에는 도시가 형성될 만큼의 넓은 분지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임금과 조정이 백성들과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이기도 했다.

남한산성의 축성시기와 주체에 대해선 2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하나는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운 성이란 것, 다른 하나는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의견이다.

남한산성이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적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번의 천도를 단행했다.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 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듯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대동야승(大東野乘)·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고서들은 남한산성은 백제의 고성이라고 적어 놓았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한창 나당전쟁이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그 다음 방어선 전략을 짰다. 그 전략이 지금의 남한산 주위에 둘레 4천360보 규모로 성을 구축했는데, 그 성의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축조했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증축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해 남한산성을 다시 개축했다.

남한산성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은 이후 재침에 대비해 수축됐고 수축 완료 후에는 광주목의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됐다. 이후 광주부로 승격됐는데, 남한산성이 기본적인 수도방어목적만이 아니라 행정의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도 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조선시대 당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렸다.

황성 옛터에 밝은 햇살이… 1999년 복원까지

군사적 요새였던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이후에는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소가 됐다. 천주교 최초의 박해인 신유박해(1791년) 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됐다. 한덕운 토마스가 최초의 순교자가 됐고 이어서 병인박해 때까지 약 300여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이곳에서 순교하게 됐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탄압을 받았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시대의 천주교 탄압은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임시 궁궐로 사용했던 남한산성의 행궁은 지리적으로 4대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17대 효종의 영릉(寧陵)과는 근접한 위치라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임금이 영녕릉 참배를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행궁이 불 태워 졌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남한산성을 조선왕조의 치욕의 역사로 부각시키는 소재로 삼기까지 했다. 당연한 결과로 남한산성은 폐허의 성터로 남게 됐다. 여기에 1917년에는 성안에 있던 군청마저 지금의 광주시내가 된 경안으로 이전, 남한산성은 쇠락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더해 일제의 방화로 터만 남아있던 남한산성 행궁터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의 일부와 함께 행궁터는 완전히 매몰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오랫동안 방치됐던 남한산성은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터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돼 2014년 마무리 됐다. 남한산성 복원에는 만해기념관의 전보삼 관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이 있었다. 이것은 남한산성복원의 초석이 됐다. 여기에 1999년 임창열 경기도지사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은 남한산성 복원에 큰 힘이 됐다.

폐허가 된 황성의 옛터에 밝은 햇살이 내려 앉고 아름다운을 꽃을 피워 세계가 인증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많은 분들의 노력은 역사에 길이 길이 남으리라.

글=우촌 박재곤 / 사진=김태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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