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슬픔 -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불교에서는 사람이 사람이 나서 죽고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로 나누는데, 이를 사유(四有)라 일컫는다. 생유는 어떤 생이 결정되는 순간이고, 본유는 생이 결정된 후부터 죽을 때까지이며, 사유는 죽는 순간을 뜻한다. 이 셋의 기간은 우리가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그런데 죽어서 다음의 어떤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의미하는 중유의 개념은 종교적 신념이 없다면 좀체로 납득하기 어렵다. 소설가 박상륭은 갓 죽은 주검들이, 죽었으되 당분간은, 모든 것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는다고 했는데라는 문장을 통해 중유의 세계를 설명한다. 거칠게 이해하자면, 죽었지만 아직은 살아서 삶의 흔적을 감지하는 여운(餘韻)의 잠시가 중유일 것이다. 단번에 가셔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여운으로서의 중유는 죽음의 세계만이 아니라 삶의 세계에도 작용한다. 황동규 시인의 「더딘 슬픔」은 그런 여운의 시간을 관조한다.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남아 있는 형광등의 형체처럼, 길모퉁이에 녹지 않는 채 남아있는 눈더미처럼, 삶의 면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길고 더딘 여운과 흔적들로 가득하다. 삶과 죽음의 교차란 그런 여운들의 애틋한 엉김이다. 잎 피지 않은 나뭇가지가 중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쓸쓸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삶과 죽음은 서로를 부여잡고 각자의 소리로 서로를 운다. 죽음이란 무 자르듯이 한순간에 삶과 결별하는 순간이 결코 아니다. 결별하되, 만남의 인연을 더듬을 수 있는 애도의 시간을 갖음으로써 죽음은 완결된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은 미래의 시간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죽은 자가 보내는 쓸쓸한 소리를 될 수 있는 한 오래 간직하는 것이 산자의 예의일 것이다. 너무 더디게/더디게 가는 봄은 죽은 자들의 삶을 살아 있게 만들고 산자들의 삶을 견고하게 만드는 최선의 시간이다. 애도가 없는 삶은 척박하다. 가볍게 스치고, 빠르게 잊는 것이 삶의 전술이 되어버린 이 시절에, 우리가 마땅히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더디고 두터운 애도일 것이다. 애도하는 자만이 삶을 사랑할 수 있다. 신종호 시인
문화
신종호
2020-05-25 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