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백인덕 담장 밖에서 밖으로만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는 안다.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 키 작은 관목조차 알고 있다. 시간은 철갑(鐵甲)을 둘러주거나 석회질 외투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님을. 밀어내는 힘과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금은 이내 상처가 되고 상처는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를 뿐이란 걸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북극권의 어두운 밤》, 시인동네, 2020. 세계는 내 의지(意志)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이 지구 상에 사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다. 장미꽃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려도 똑같은 모습의 장미꽃이 없듯이 이 세계는 각자의 의지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 그런 불가피의 사정을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말하면 표상인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한마디로 세계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내 의지에 비친 바깥의 모습이라는 게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그 생각을 확장해보면 삶이란 나라는 안(內)의 영역과 세계라는 바깥(外)의 영역이 맞부딪히는 어떤 전투 같은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백인덕 시인은 시 시작은 벼락처럼 온단에서 그 전투를 밀어내는 힘과/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로 표현한다. 밀어냄과 억누름의 전투는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은 대체로 의지를 강한 것에 결부시킨다. 불굴의 의지라는 관용적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솔직하지 못하거나, 혹은 허위적일 경우가 많다. 세계의 억누름은 의지의 밀어냄보다 강하다. 삶의 동력은 성공의 의지가 아니라 실패의 자각에 있다. 그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녕 아프다.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생긴 금이 상처가 되고, 그 상처가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르는 일련의 과정을 진술하는 시인의 솔직한 내면은 허탈하고 힘겨워 보인다. 그렇지만 허탈보다 어떤 약동이 앞선다. 뜻밖의라는 표현은 의지의 영역을 벗어나는 무방비의 순간으로 읽히기보다는 새로운 시간의 진동으로 다시 읽힌다.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는 강렬하고 빛나는 구절 때문에 그러하다. 아파하는 자만이 회복의 기미를 읽을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한 자만이 성공의 기회를 엿볼 수 있다. 가장 깊게 침몰할 때 비로소 바닥을 치고 오를 수 있다. 벼락처럼 찾아오는 시작을 사유하는 시인에게서 나는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키 작은 관목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꽃다발

꽃다발 -김이듬 축하해 잘해봐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묶을 때 천천히 풀 때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나는 길을 걸었다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2011. 침묵은 말의 시작이고 완성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난 후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부했다. 경제학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그의 출현을 신이 도착했다!는 엄청난 문장으로 표현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논리-철학논고』를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 같아 포기하려다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읽기는 했는데 결과는 참패였다. 어쨌든, 『논리-철학논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회자되는 문장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 문장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불화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생겨난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는 정 반대되는 것, 이를테면 맘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문제다. 빈말은 세상을 공허하고 불순하게 만든다. 그런 말들은 급기야 상처가 된다. 김이듬 시인의 시 ?꽃다발?의 첫 구절을 읽으며 나는 빈말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많이 떠돌고 있는지를 실감한다. 축하해, 잘해봐라는 말은 과연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라는 시인의 표현은 그런 말들이 비난이나 질투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읽힌다.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란 비난에 무감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꽃다발을 묶고 푸는 상황이나,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란 참 묘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한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기에 그 결핍을 메우려는 언행을 유발한다. 축하한다는 말은 어찌 보면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는 것이기도 하다.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는 것도 그렇다. 이런 심리는 근원적이어서 시비(是非)를 따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시인은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즉 드러내놓고 비난하거나 시기를 해도 괘념치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시인의 그런 모습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인간처럼 의도를 숨기고 빈말을 하지 않는 것이 동물이다. 시인이 말하는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란 침묵과 고독의 길일 것이다. 침묵과 고독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구역이다. 석가모니가 가만히 연꽃을 들어 올리자 제자 가섭이 그 뜻을 헤아려 빙그레 미소를 지은 것처럼 말의 길은 침묵을 통해 조성된다. 침묵은 말의 소멸이 아니다. 말의 시작이고, 말의 완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빈말의 욕망이 늘 문제다. 김이듬 시인의 시를 읽고 새삼 다짐한다. 침묵하자!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남해 여자

남해 여자 -박완호 손을 갖다 대자 그녀는 푸르고 물렁물렁한 몸을 일으키며 심장 고동을 고스란히 느끼라는 듯, 온몸이 점점 투명해져서는 나한테만은 속내를 다 까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저를 활짝 열어젖혔다 저 차가운 이마에 손이라도 얹어줄까 모른 척 뭍으로 달아나버릴까, 하던 난 푸르디푸른 그 속내에 한순간 물들어버렸다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시인동네, 2020. 은밀하고 에로틱한 유혹의 기술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끌어 올리노라.는 부분은 구원한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독일어에 일천한 나로서는 어떤 해석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끌어 올린다.에 훨씬 마음이 간다. 인간의 방황은 유혹에서 시작된다. 삶의 궁극을 하나의 동사로 표현하자면 유혹되다.일 것이다. 지식도 유혹이고, 시도 유혹이다. 사랑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삶을 고양시키는 모든 것은 다 유혹이다. 유혹과 방황은 끝없이 이어지며 서로를 끌어안고 간다. 이런 밀착의 관계를 구원한다.로 해석하는 것은 유혹과 방황의 생동(生動)에 종지부를 찍는 느낌을 주기에 나는 이끌어 올리노라.에 눈길이 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의 의미를 진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나는 유혹이라 생각한다. 간혹 진리를 여성적이라는 것으로 특화해 진리란 남성만의 소유라는 것을 강조하는 해괴한 논리를 듣기도 한다. 그런 주장은 일천하다. 유혹적인 것은 남녀라는 위계와 구분을 넘어선 것이다. 유혹은 사랑의 속성이자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미적(美的)인 힘이다. 유혹하고 유혹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다. 박완호 시인의 시 〈남해 여자〉는 그 방식에 담긴 밀고 당김의 에로틱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화자는 그녀에게 손을 갖다 댄다. 문을 열기 위해 노크를 하는 것처럼 화자의 손댐은 그녀의 몸에 대한 작은 질문이자, 유혹이다. 화자의 작은 질문에 그녀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릴 정도로 푸르고 물렁물렁한 몸을 활짝 열어젖힌다.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낸 그녀의 대답은 화자를 향한 적극적이고 커다란 유혹이다. 해안을 향해 밀려오는 커다란 파도처럼 솟구쳐 화자를 덮치는 유혹의 파동(波動)에 화자는 이마에 손이라도 얹을까 아니면 뭍으로 달아날까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그 속내에 한순간 푸르게 물들어 버린다. 유혹하다 유혹당한 것이다. 소극적 태도에서 적극적 태도로 일순간 이끌어 올리어진 것이다. 활짝 열린 것을 보고 무조건 달려드는 것은 에로틱하지 못하다. 갈까 말까 망설이는 흔들림이 있어야 에로틱하다. 밀고 당김의 연쇄, 소극성과 적극성의 길항(拮抗)이 빚어내는 유혹의 미묘함이 있기에 시 〈남해 여자〉는 은밀하게 에로틱하다. 일방적으로 쇄도하는 사랑은 폭력적이다. 유혹으로 묻고 유혹으로 대답하는 것이 사랑이다. 대답이 없다면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한다. 세상은 넓고 유혹할 대상은 많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랑은 없다는 식의 단순한 신조(信條)는 위험하다. 사랑은 신조의 들이댐이 아니라 유혹의 기술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그리운 명륜여인숙

그리운 명륜여인숙 -오민석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이십 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2015.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에 그 유명한 프루스트 효과 혹은 마들렌 효과라 일컬어지는 사건이 묘사된다. 고모가 건네준 홍차에 적신 프티트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맛본 주인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 고향 콩브레의 모든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회상한다. 프루스트 효과는 특정 냄새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좀 더 면밀히 살피면 냄새로 과거의 장소를 떠올린다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모든 기억은 장소와 연결돼 있다. 장소와 맺어지지 않는 기억은 불투명하고 애매하다. 오민석 시인의 시 〈그리운 명륜여인숙〉은 읽는 순간 아!라는 탄성을 낮게 터뜨렸다. 시인의 경험과는 결이 다르지만 명륜여인숙이라는 장소가 환기하는 청춘의 굴곡진 추억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불면의 밤에 떠올린 명륜여인숙은 젊음의 방황과 사랑의 체취가 짙게 서린 낭만의 장소로 드러난다. 아마도 명륜동 어딘 가에 있었을 그 여인숙은 만취의 이십대가 기성세대와 현실의 질곡을 향해 던지는 객기와 반항과 진지함이 소용돌이치는 질풍노도의 뜨거운 장소였을 것이다. 술에 취해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다 잠이 들기도 했던 젊은 날의 그곳. 문학과 철학과 사랑을 논하며 우리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서투르고도 진지한 미래의 다짐을 결의하던 여관방에 별처럼 빛나던 30촉짜리 알전구와 눈발을 맞으며 집 아닌 집을 찾아 하나 둘 떠나는 그들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새벽 종소리. 시인은 그런 젊은 날의 풍경을 푸른 정거장의 아련함으로 기억한다. 시인이 명륜여인숙을 그리워하는 것은 낭만의 행적이 사라졌다는 회한 때문일 테다. 도서관이 시험 준비를 하는 장소가 되고, 학교가 무한경쟁의 장소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위급해 보인다. 모든 장소가 취업과 자기계발의 실용적 장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사랑과 낭만의 장소는 오래전에 우리 기억 속에서 강제철거된 것 같다. 그래서 오민석 시인의 시 〈그리운 명륜여인숙〉이 더 애틋하게 읽혀진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마지막 힘

마지막 힘 -박승민 고구마를 걷어낸 밭에 상강 서리가 내리던 날 늙고 썩어 버려두었던 사과나무에 활짝, 하얀 꽃이 피었다. 삼년 내내 풍으로 앓아 누운 주영광씨, 저녁나절 번쩍 눈떠 마누라 한번 쓱 보더니 사과밭에 물! 한마디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 한마디 결구를 맺느라 혼자서 무던히도 아프고 눈감지 못했던 것이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창비, 2020. 해가 떠서 지는 하루의 시간은 사람이 태어나 죽는 일생에 비유되곤 한다. 정오의 태양을 청춘에, 저물녘의 태양을 노년에 빗대는 것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순리에 기반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삶은 참 덧없고 짧다. 일몰 직전 잠시 하늘이 밝아지는 순간을 일러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나아가 사람이 죽기 직전 잠시 기운이 돌아오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항시 유념하며 살았는데 그것은 죽음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박승민 시인의 시 마지막 힘을 읽으면서 회광반조와 메멘토 모리의 뜻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하다. 서리 내린 빈 고구마 밭과 늙고 썩어 힘겹게 서 있는 사과나무의 모습은 황혼녘의 풍경처럼 쓸쓸하다. 그런데 다 썩은 사과나무에 뜻하지 않게 활짝 사과 꽃이 피었다 하니, 말 그대로 회광반조의 풍경이다. 사과나무는 왜 꽃을 피웠을까? 사과나무의 꽃핌이란 이 시를 읽는 이들의 삶이 다양한 것처럼 여러 방향의 의미로 반조될 것이다. 여하튼, 사과나무의 꽃핌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려는 안간힘으로 여겨지는데, 시인은 그 속내를 삼 년 내내 풍을 앓아 누운 주영광씨의 모질고 긴 사연을 통해 드러낸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눈을 번쩍 뜨고 사과 밭에 물!이라고 외치는데, 이 간결한 외침에 담긴 속뜻은 아주 깊어 보인다. 그 외침은 사과 밭에 물을 주는 행위를 넘어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주린 자에게는 음식을 먹이는 것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삶의 보편적 이치로까지 확장되어 읽힌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인간의 복잡한 오만은 삶을 추하게 만든다. 사과 밭에 물!이라는 주영광씨의 마지막 결구는 단순해서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마디 결구를 맺기 위한 회광반조의 성찰과 매순간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의 자세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위태로울 것이다. 생명은 필멸이지만 그 필멸을 딛고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된다. 사과 밭에 물!을 주는 것, 그것이 나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사랑이자 생명의 완결이라는 것이 박승민 시인이 말하려는 마지막 힘이 아닐까?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오래된 연애

오래된 연애 -장석주 가을은 끝장이다. 여러 개의 파탄이 한꺼번에 지나간다. 양파를 썰자 눈물이 난다. 개수대 아래로 물이 흘러들어간다. 당신이 떠난 뒤 종달새는 울지 않는다. 장롱 밑에서 죽은 거북이 나오고 우리는 잦은 불행에 대해 무뎌진다. 접시를 깬다, 실수였다, 앞니마저 깨진다. 분별이 무서워서 분별을 멀리했다. 짧은 황혼 속에서 빛이 희박해지면 나무는 어둠 속에서 목발을 짚고 일어선다. 누군가 허둥거리고 물이 얼자 인도네시아에서 온 원숭이들이 웅크린 채 잠든다. 우리가 하지 않은 연애는 슬프거나 치졸했다. 이별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여름과 겨울이 열 번씩 지나갔다. 날씨는 늘 나쁘거나 좋았다. 영혼은 무른 부분에서 부패를 시작한다. 나는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화상통화로 연인의 안부를 묻고,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는 요즘의 풍속은 참 많은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다. 오래되고 느린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초스피드의 세태는 이별의 아픔도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치닫게 한다. 그래서 와이파이 시대의 사랑은 가볍다. 끊기면 모든 게 끝이다. 돌아보지도 않고 살펴보지도 않는다. 이런 나의 생각이 과하다거나 시쳇말로 구리다고(?) 할 여지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사랑이란 단칼에 끊어낼 수 있는 손쉬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코 쿨하지 않다. 거슬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한 일방통행의 사랑은 없다. 이별도 그렇다. 장석주 시인의 시 ?오래된 연애?는 여름과 겨울이 열 번씩 지나가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이별의 아픔과 후회의 심사를 고백하는데, 그 아픔이 가을은 끝장이다.라 할 만큼 깊다. 또한 여러 개의 파탄이 한꺼번에 지나갈 정도로 힘겨워 보인다. 왜 오래된 연애가 끝장나고 파탄이 났을까? 이런 의문은 섣부르고 지나치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연애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태도다. 양파를 썰고, 눈물이 나고, 개수대에 물이 흘러 들어가고, 장롱 밑에서 죽은 거북이 나오고, 종달새는 울지 않고, 접시가 깨지고, 원숭이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드는 일련의 상황 묘사는 자신의 일상과 의식이 혼미하고 온통 아픔에 잠겨 있음을 보여준다. 이만큼 아파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깊었다는 증표다. 불행에 무뎌지고, 분별이 무서워 분별을 멀리함으로써 이별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 시절의 사랑을 잊을 수 없어 영혼은 무른 부분에서 부패가 시작될 만큼 고통스럽다. 그래서 나는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표현이 더없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런 고백은 아주 깊은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랑의 끝에는 헤어짐이 있다. 실수와 잘못에 의해서든 아니면 죽음에 의해서든 헤어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사랑과 이별의 역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깊이 사랑하고, 오래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 자세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슬프거나 치졸해질 뿐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반성 156

반성 156 -김영승 그 누군가는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 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훤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반성》, 민음사, 2007 말의 뜻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불화가 싹튼다. 의도한 것과 의도된 것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할 때 우리는 말의 한계를 느낀다. 아니, 말의 한계라기보다 그 말이 오가는 맥락의 막힘이 문제일 것이다. 맥락은 자기중심적이다. 말하는 자의 맥락과 그 말을 듣는 자의 맥락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다. 타인의 말은 자기 생각의 맥락을 통해 재해석된다. 그래서 발화된 말들은 맥락의 벌판에서 눈덩이처럼 부풀어 세상 곳곳을 굴러다닌다. 그것이 소문의 법칙이며, 스캔들(scandal)의 발생 기반이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스캔들은 일반적 장애물이 아니라 거의 피할 수 없는 기묘한 장애물이라 했던 것은 말의 한계, 해석의 차이 등에서 빚어지는 오해가 인간사에 필연적인 것임을 지시하는 것이라 이해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스캔들의 발생은 필연적이라는 르네 지라르의 견해는 반박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되돌릴 수 있는, 즉 반성의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 또한 스캔들의 불가피성만큼 명약관화하다. 1987년에 발행된 김영승의 시집 『반성』은 반성이라는 표제에 번호를 붙인 시편들을 선별해 묶고 있는데, 시집의 제일 마지막 시편이 ?반성 608?이다. 608이라는 번호는 적어도 반성이라는 주제로 608편이 넘는 연작시를 썼다는 뜻일 터인데, 이 사실은 매우 놀랍기만 하다. 김영승 시인의 반성 연작시들은 시인 개인의 반성이라기보다 불화와 오해와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반성으로 읽혀진다. 그의 연작시들은 하나같이 우리 안에 숨겨진 치부와 속스러움을 통렬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시 ?반성 156?의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는 구절은 특히나 매섭다. 사랑이 끔찍하게 다른 것이 되었다는 시인의 인식은 우리 시대의 사랑이 스캔들(추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지고의 가치들이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시인의 답이다. 마아고트 폰테인과 마곳 훤틴이라는 사소한 발음의 차이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구별 짓는 속물성은 자기만의 주관적 맥락으로 타인을 재단하는 일종의 억압이고 폭력이다. 그런 살벌하고 끔찍한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잘 보여야 살수 있다는 시인의 말은 그들에 대한 비꼼이자 반어이며, 나아가 반성에 대한 촉구로 읽혀진다. 이것이 시 ?반성 156?이 전하는 메시지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소통의 벽이 막히고, 자기만의 맥락에 갇혀 타인의 의도를 곡해하는 정도가 심해질 때 시인이 말한 바처럼 우리의 삶은 마지못해 사는 것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과 친하게 살지 못하고 붕어나 참새 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사는 것을 더러 본다는 시인의 말이 냉소적이고 쓸쓸하게 들린다. 반성하는 삶이 그만큼 어렵고 드물다는 뜻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빗자루

빗자루 -정호승 겨울 산사 마당에 쌓인 눈을 다 쓸고 나서 해우소 가는 길 옆 소나무에 기대어 부처님처럼 고요하다 오목눈이 동고비 직박구리 멀리 눈밭을 날아와 뭘 먹을 게 있다고 몽당빗자루를 쪼아대다가 빗자루 옆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하다 《당신을 찾아서》, 창비, 2020. 마음이 답답하거나 불안할 때 나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책』을 꺼내 읽는다. 옛 선비들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산가지로 주역의 괘를 풀어 그날의 길흉을 점치고 언행에 조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나도 눈을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책 속의 문장에 집중한다. 그렇게 하면 거짓말처럼 그 페이지의 어느 한 문장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현대인들에게 불안과 답답함은 일시적 감정이 아닐 것이다. 늘상 지고 있어야만 하는 마음의 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짐벗기의 몸부림으로 『불안의 책』을 자주 펼쳐 읽게 되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문장이 노동은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스스로 활기를 띤다. 더 이상 일하지 말자. 우리에게 선고된 의무는 잠시 보류하자.는 것이다. 이 문장의 방점은 일하지 말자는 것에 있기보다 의무를 잠시 보류하자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다 짊어질 수 없는 의무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보라는 것일진대, 그것은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을 용기 있게 취해보라는 권고일 것이다.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한적함을 만끽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궁여지책이랄 수도 있겠지만, 떠나지 못해 답답함이 몰려올 때 하던 일 멈추고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는 것이 마음 전환에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우연치 않게 읽게 된 정호승 시인의 시 ?빗자루?는 떠나지 않고도 떠남의 풍요와 한적함을 물씬 느끼게 해줘 참 기뻤다. 시 ?빗자루?는 해석이 별로 필요치 않아 보인다. 눈 쌓인 산사의 고요한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그 안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평안해 진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읽어보면 눈을 쓰는 어떤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빗자루가 주인공이 되어 산사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쌓인 눈 다 쓸고 소나무에 기대 서있는 산사의 빗자루의 여유는 법당 안에 있는 부처님의 미소보다 더 여유롭게 보이기도 한다. 오목눈이 동고비 직박구리가 날아와 여기저기를 쪼아대도 의젓이 소나무에 기대 서있는 겨울 산사의 빗자루에서 감지되는 넉넉한 고요와 평안. 짹짹이던 새들도 그 고요함에 깃들어 눈 감고 휴식을 취하게 만드는 빗자루의 이미지로부터 마음 치유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의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게 삶의 필연이라면, 그 짐 잠시 내려놓고 쉬엄쉬엄 놀다 가는 일탈의 자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소나무에 기대어 있는 겨울 산사의 빗자루처럼 현실의 의무를 잠시 보류하고 자신만의 고요와 평안을 찾아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보자.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겨울 하나대

겨울 하나대 - 유하 참새 지저귐만 징허게 시끌맞다 흙빛으로 썩어가는 마람 이엉 학잔집 일곱 딸년 웃음 강그러지던 그 자리도 참새 짹짹이는 소리만 왼종일 징허게 시끌맞다 참새 떼가 어른난 마을 새 울음도 이리 들으니 귀가 질리는 것을 뉘 있어 손이라도 휘휘 저어 저 한껏 방자해진 새떼를 쫓겠는가 꼬부랑 망구 몇 웅크린 집집 벼람박엔 대나무 효자손 하나 손때 절어 덩그러니 반짝인다 *하나대: 전북 고창군 상하면의 작은 부락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1991 도시는 소리의 그물이다. 수많은 소리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사람들의 일상을 잡아챈다. 알람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핸드폰 벨소리, 내비게이션 안내소리, 주문한 커피 찾아가라는 진동벨소리 등등 도시 사람들은 무수한 기계음을 따라 생각 없이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병졸(兵卒)들 같다. 그 많은 소리 중 팔 할은 사실 잡음(雜音)이라 여겨도 무방하다. 필요 없는 소리들이다. 잡음 중에 신경을 찌르고, 기분을 불쾌하게 하는 기계 소음(騷音)은 근대 도시의 한 특징일 것이다. 소음은 소리의 과잉이고, 의미의 실종이다. 요즘 들어 귀농이나 귀촌이 급증하는 이유는 도시의 삶 자체가 소음에 섞여 이리저리로 시끄럽고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요와 적막과 평안을 찾아 시골로, 자연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도 때론 시끄럽다. 삶이 너무 외롭고 적막하면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도 시끄럽게 느껴진다. 유하의 시 ?겨울 하나대?는 나서 키운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꼬부랑 망구 몇 웅크린 집집의 적막한 풍경을 묘사한다. 한 때 일곱 딸들의 웃음소리로 꽉 찼던 집은 참새 짹짹이는 소리만 가득하다. 이엉도 썩고, 벽도 허물어져 간다. 자식들 커가는 소리가 사라진 낡은 집에서 혼자 듣는 참새소리는 징허게 시끌맞다. 예전 같으면 저 참새들을 휘휘 쫓아줄 자식이나 남편들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다. 적막과 외로움 속에서 하루 종일 들어야만 하는 참새소리에 귀가 질린다. 도시인들에겐 마음에 안식을 주는 자연의 소리겠지만 꼬부랑 망구들에겐 그렇지 않다. 소리란 이렇듯 역설적이다. 웃고, 싸우고, 덜그럭 거리며 함께 밥을 먹는 생기(生氣)의 소리가 있어야 자연의 소리도 듣기 편하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내는 불편 소리가 없는 집은 쓸쓸하다. 시인은 그 쓸쓸함을 꼬부랑 망구들의 집 벼람박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손때 절은 대나무 효자손으로 드러낸다. 그 어떤 사물의 이미지가 늙어감과 외로움과 적막의 지경을 대나무 효자손만큼이나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쓸쓸함이란 곁에 등 긁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리라. 홀로 앉아 가려운 등을 효자손으로 북북 긁는 겨울 하나대 마을의 할머니들 모습에서, 나는 불현듯 지니 음악을 틀어줘.라고 말하는 TV 속 광고 모델을 떠올려 본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내는 희로애락의 소리가 없는 삶은 차갑고 쓸쓸하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철심

철심 - 고영민 유골을 받으러 식구들은 수골실로 모였다 철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쇄사가 물었다 오빠 어릴 때 경운기에서 떨어져 다리 수술했잖아, 엄마 엄마 또 운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분쇄사는 천천히 철심을 골라냈다 《봄의 정치》, 창비, 2019 선가(禪家)의 화두 100칙을 수록한 『벽암록』(안동림 역주, 현암사)의 27칙에 체로금풍(體露金風)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이 나온 배경은 이렇다. 한 중이 운문 선사를 찾아와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운문선사는 지체 없이 나무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천지에 가을 바람만 가득하지.라고 답했다. 나무의 몸을 가렸던 무수한 잎이 가을 바람(金風)에 다 지고 본래 모습을 드러냄(體露)을 뜻하는 체로동풍은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참모습의 사태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여준다. 교언영색의 치장을 멀리하고 불립문자의 간결에 몰두하는 것이 선사들의 수행인 것처럼 표현의 절제를 통해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이 시인들의 시 쓰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표현의 절제란 쉽지 않다. 표현은 유혹이고 욕망이기에 그렇다. 고영민 시인의 시 ?철심?은 체로동풍의 사태처럼 말의 군더더기가 없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쉽게 읽히지만 울림의 폭은 크고 무겁다. 이는 표현의 절제에서 오는 시적 성취의 결과다. 철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분쇄사의 간결한 물음은 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산 자들의 슬픔에 모진 파문을 일으킨다. 다리에 철심을 박고 살아온 한 생의 사연이 분쇄되면서 남긴 저 차가운 금속의 흔적 앞에 또다시 울음을 머금어야 하는 엄마와 형제들의 마음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로 드러낼 수 없는 그 심정의 아득함을 시인은 철심이라는 이미지로 다 드러낸다. 여기에 선가의 화두(話頭) 같은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어떤 것이 있을까?라는 물음이 겹쳐지면서 시 「철심」은 화자와 가족은 물론 독자들의 가슴에 영영 타지 않을 철심 하나를 박아 놓는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자만이 삶과 죽음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나뭇잎 다 떨구고 본래 면목을 드러내는 가을 나무는 앙상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것이리라. 견고한 것은 고귀하고, 고귀한 것은 영원히 남는다. 고영민 시인의 철심의 이미지는 슬프지만 견고하다. 그래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더딘 슬픔

더딘 슬픔 -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불교에서는 사람이 사람이 나서 죽고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로 나누는데, 이를 사유(四有)라 일컫는다. 생유는 어떤 생이 결정되는 순간이고, 본유는 생이 결정된 후부터 죽을 때까지이며, 사유는 죽는 순간을 뜻한다. 이 셋의 기간은 우리가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그런데 죽어서 다음의 어떤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의미하는 중유의 개념은 종교적 신념이 없다면 좀체로 납득하기 어렵다. 소설가 박상륭은 갓 죽은 주검들이, 죽었으되 당분간은, 모든 것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는다고 했는데라는 문장을 통해 중유의 세계를 설명한다. 거칠게 이해하자면, 죽었지만 아직은 살아서 삶의 흔적을 감지하는 여운(餘韻)의 잠시가 중유일 것이다. 단번에 가셔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여운으로서의 중유는 죽음의 세계만이 아니라 삶의 세계에도 작용한다. 황동규 시인의 「더딘 슬픔」은 그런 여운의 시간을 관조한다.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남아 있는 형광등의 형체처럼, 길모퉁이에 녹지 않는 채 남아있는 눈더미처럼, 삶의 면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길고 더딘 여운과 흔적들로 가득하다. 삶과 죽음의 교차란 그런 여운들의 애틋한 엉김이다. 잎 피지 않은 나뭇가지가 중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쓸쓸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삶과 죽음은 서로를 부여잡고 각자의 소리로 서로를 운다. 죽음이란 무 자르듯이 한순간에 삶과 결별하는 순간이 결코 아니다. 결별하되, 만남의 인연을 더듬을 수 있는 애도의 시간을 갖음으로써 죽음은 완결된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은 미래의 시간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죽은 자가 보내는 쓸쓸한 소리를 될 수 있는 한 오래 간직하는 것이 산자의 예의일 것이다. 너무 더디게/더디게 가는 봄은 죽은 자들의 삶을 살아 있게 만들고 산자들의 삶을 견고하게 만드는 최선의 시간이다. 애도가 없는 삶은 척박하다. 가볍게 스치고, 빠르게 잊는 것이 삶의 전술이 되어버린 이 시절에, 우리가 마땅히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더디고 두터운 애도일 것이다. 애도하는 자만이 삶을 사랑할 수 있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어쩌자고

어쩌자고 - 진은영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자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이 흐르는지,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지. 유리공장에서 한 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Descartes, Ren)는 어려서부터 의심이 많았다. 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사인이 결핵이었다. 갓 태어난 데카르트도 결핵을 앓았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병 때문에 혼자 침대에 누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만 많아지게 되고 결국엔 그 생각들이 의심으로 체계화되어 그는 평생을 의심하는 철학자로 살았다. 어린 데카르트가 침대에 누워 바라본 세계는 어떠했을까?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상과 사건들에 대해 왜라고 물어보지만, 대답이 없는 세계의 무표정함에 의심의 싹을 틔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고, 있다면 의심하는 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제시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불확실한 세계를 사는 인간의 고독을 여실히 보여준다. 의심하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의심하는 불합리의 순환을 감당하는 삶이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삶은 지속된다. 진은영 시인의 시 「어쩌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의 하염없는 심정을 토로한다. 어쩌자고 밤은 오는가? 어쩌자고 물 위에 달리아 꽃잎이 맴도는가? 어쩌자고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깨지는가? 어쩌자고 널 사랑하고, 어쩌자고 시를 쓰는가? 시인이 열거한 어쩌자고라는 말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난감해 보이지만 이미 우리는 그 무게를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 삶은 불합리하다. 그 불합리를 운명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어쩌자고라는 외침이 나올 수밖에 없다. 널 사랑하는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더 사랑하게 되는 게 사랑의 운명이다. 그 운명 앞에서 우리는 가끔 조급해질 수도 있다. 어쩌자고 젖은 빨래가 마르지 않느냐고 초조해할 수도 있다. 지독한 비관주의자는 빨래를 물속에 계속 담아두면 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로 마른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젖은 빨래는 마른다. 데카르트가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한 이유는 세계의 모든 것을 믿기 위해서였다. 시인이 우리에게 던진 어쩌자고의 맥락도 마찬가지다. 진은영 시인의 시 「어쩌자고」에 반복되고 있는 어쩌자고는 감당해야 할 것들을 감당하기 위한 정신의 응전이라 할 수 있다.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시인이 말하려는 어쩌자고의 미래를 엿본다. 그것은 격렬하게 타올라 부드럽게 재를 남기는 삶이 아닐까?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오래된 일

오래된 일 - 허수경​ 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렸는지도 오래된 일 봄저녁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억의 팔 할은 슬픔인 듯하다. 기뻤던 일은 금세 휘발돼 아련해지지만 슬펐던 일은 응어리져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가 느끼는 대개의 슬픔은 타자로부터 생겨난다. 나와 타자는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고 엇갈림이다. 사랑도 엇갈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이면은 슬픔이다. 엇갈리지 않는 완벽한 사랑은 신들의 몫이다. 인간은 엇갈리기 때문에 사랑하고, 엇갈리기 때문에 헤어진다. 그것이 사랑의 역설이다.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불멸의 유혹이 된다. 우리의 사랑은 엇갈림의 상처를 회상함으로써 뒤늦게 완성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하였기에, 혹은 네가 나를 아프게 하였기에 사랑은 기억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진실한 의무다. 하여, 회상되지 않는 사랑은 가짜다. 허수경 시인의 「오래된 일」은 지독한 봄날의 일을 회상한다. 그 봄날의 일이 사랑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남모르게 슬며시 보내는 그의 눈길에 떨며 고개를 수그리는 화자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그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리는 어린 연두 물빛처럼 싱그럽고 투명하다. 그를 향한 사랑을 어린 연두 물빛으로 비유할 만큼 화자의 사랑은 애절했지만 주소 없는 꽃엽서와 벗 없이 마신 술이라는 표현에서처럼 견디기 어려운 어떤 엇갈림의 사연으로 둘의 사랑은 지독한 봄날이 된다. 네 눈이 바라보던/내 눈의 뿌연 거울처럼 그는 내 눈에 서린 슬픔을 보지만 기실 내 눈의 뿌연 거울에 비친 것은 그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일 것이다. 내가 너를 보는 것과 네가 나를 보는 시선의 엇갈림으로 사랑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지는 오래된 일이 된다.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할 만큼 지독히 사랑했던 봄날의 시간은 엇갈림의 시선으로 오래된 일이 되었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현재의 시간으로 회귀 된다는 것이 시 「오래된 일」의 전언일 것이다. 잊혀지는 사랑은 없다. 잊혀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모란

모란 -이문재 앞뜰이 생기면 두어평 앞뜰이 생기면 옮겨 심으리라 마음 속 피고 지던 모란 모란이 피면 마당에 나가서 보리라 엄동설한에도 피고 지던 그 마음속 백모란 -월간 《시인동네》 2020년 3월호.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흙의 기운을 느끼며 채소를 가꾸는 텃밭 체험의 보람은 친환경 먹거리를 얻는다는 실리적 측면보다 삭막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마음의 위로를 받는 심리적 측면에 있다 할 수 있다. 텃밭만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는 일도 그렇다.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 도시의 거주공간은 대부분 마당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공동의 마당이어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꿀 처지가 못된다. 마당이나 뜰이 없는 집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는 정원을 가꾸는 일은 영혼이 쉴 곳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뜰이나 정원을 마련하는 것은 곧 마음의 안식처를 만드는 것일 터이다. 이문재 시인의 시 〈모란〉은 읽을수록 마음이 편해진다. 담백하다. 군소리가 없어 마음이 깨끗해진다. 담백하다 해서 아무 맛도 없이 싱겁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 안쪽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간절함이 있다. 앞뜰이 생기면/두어평 앞뜰이 생기면이라는 반복과 점층이 뜰을 마련하고픈 절실함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시인이 원하는 자그마한 두어평의 뜰은 영혼의 안식처라 할 수 있다. 마음 속에서 홀로 수없이 피고 졌던 모란은 심중에 묻어두었던 어떤 열망이나 사랑 혹은 아픔일 것이다. 생활이라는 핑계로 혹은 용기 없음으로 인해 말하지 못했던 마음 속의 사연. 그런 은밀의 사연을 담은 모란꽃은 시인만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에 하나씩은 심겨져 있을 것이다. 엄동설한에도 피고 지며 자신에게 위안을 준 백모란을 두어평 앞뜰에 옮겨 심어 눈으로 보고자 하는 시인의 염원은 영혼의 위로와 안식을 바라는 간절함으로 읽혀진다. 두어평 앞뜰이라는 소박한 장소에 담겨진 시인의 조용한 동경이 시를 읽는 내 마음에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간절함이 없는 삶은 간을 하지 않은 음식처럼 맛이 없다. 간절함이 있기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백모란 피는 뜨락의 봄처럼 아름답고 생생하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는 바로 지금이 앞으로 다가올 봄에 해야 할 많은 일 중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시기다.(《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마음에 깊게 드리운다. 지금의 시간을 가꾸는 사람만이 미래의 정원에 꽃을 피울 수 있다.

[시 읽어주는 남자] 강아지풀 위에 쌓이는 눈

강아지풀 위에 쌓이는 눈 - 정병근 눈 온다 눈 쌓인다 강아지풀 눈 받는다 누비이불을 덮어쓴 길이 맨발로 걸어온다 이름도 정부政府도 없는 한 생각이 흔들린다 잘못되지 않으리 세상에 헛사는 것은 없네 천지간 눈 온다 강아지풀 눈 받는다 독려도 교훈도 없이 전 규모로 전속력으로 눈 온다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2020. 타블라 라사(tabla rasa)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판(書板)을 뜻하는 라틴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본성이 원래 깨끗하다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차용한 타블라 라사는 존 로크와 니체 등 여러 철학자에 의해 인용되곤 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태블릿 PC의 태블릿(Tablet)이라는 어원도 타블라에서 온 것이다. 삶이라 서판에 무언가를 그리거나 혹은 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빈 서판을 갖고 태어났는지 아니면 밑그림이 그려진 서판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확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빈 서판이든 아니든 간에 뭔가를 채우려는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을 즈음이 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불현듯 삶이, 생활이, 인간관계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병근 시인의 시 「강아지풀 위에 쌓이는 눈」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어렵게 설명하면 어렵지만 쉽게 설명하면 쉬운 게 자유의 의미일 것이다. 시인은 눈 온다/눈 쌓인다/강아지풀 눈 받는다는 표현으로 간명하게 자유를 설명한다. 눈이 오면 눈을 맞는 것, 그것이 자유다. 눈이 쌓이고, 강아지풀이 눈을 맞고, 누비이불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길들이 맨발로 걸어 나오는 자유의 풍경들을 시인은 이름도 정부(政府)도 없는 한 생각으로 모아서 비유한다. 드러내야 할 이름도 없고, 행사해야 할 권력도 없는 게 자유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이름을 찾고 정부를 찾는다. 눈 내리는 풍경을 좋아하면서도 길이 얼어 차가 막힐 것을 걱정한다.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어딘 가에 다시 귀속되려 한다. 불안 때문에 그렇다. 한 생각이 흔들린다는 것은 자유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가로막는 생활의 논리 때문에 생긴 갈등일 것이다. 지금의 내 삶이 흔들리고 있지만, 잘못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헛사는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자유에의 의지를 시인은 독려도 교훈도 없이 전 규모로 전속력으로 천지간에 내리는 눈을 통해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빈 서판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의 독려나 교훈이라는 밑그림을 지워야 한다. 내리는 눈처럼, 전 규모의 의지와 전 속력의 행동으로 타인의 독려와 교훈을 덮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어주는 남자] 내 마음속의 모든 슬픔을……

내 마음속의 모든 슬픔을 -프랑시스 잠 내 마음속의 모든 슬픔을 네가 알 수 있다면, 병들고 가여운 어느 어머니의 눈물에 넌 그걸 비교하리. 지치고 휑하고, 일그러지고 창백한 얼굴의 어느 어머니, 바로 닥친 죽음을 느끼고, 막내 아가에게 주려고 윤나는 장난감, 그러나 싸구려 장난감을 그 앞에 풀어 보이는 그런 가여운 어머니의 눈물에.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민음사, 2014 슬픔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마치 안개 같아서 딱 잘라 무엇이라 정의(定義)하기 어렵다. 사전을 찾아보면 슬픔이란 슬픈 마음이나 느낌,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라 적혀있다. 이런 정의는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테(Alighieri, Dante)는 《신곡》의 ?지옥편?에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큰 슬픔은 없다.라고 썼다. 단테의 말은, 슬픔이란 그 자체로 이해되어지기보다 행복과 견주어 볼 때 그 윤곽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면 그것을 다른 것과 견주어 보는 행위, 즉 비유(比喩)를 구사해보면 된다. 행복이란 충족에서 오는 감정이다. 일례로, 배가 부르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슬픔이란 결여에서 오는 감정의 분출이라 유추할 수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런 슬픔들 중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일까?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의 시 ?내 마음속의 모든 슬픔을?은 모든 슬픔의 근원을 병들고 가난한/어느 어머니의 눈물에 비유한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것이다. 그래서 타인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정말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어떤 일로 슬퍼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느끼는 슬픔의 깊이까지 측정할 수는 없다. 만약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눈물과 견주어 짐작할 때만, 즉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프랑시스 잠의 생각이다. 어머니는 모든 충족의 근원이자 행복의 발원지다. 내 마음속의 모든 슬픔이란 어머니 같은 것들의 상실에서 오는 결여의 감정이다. 지치고, 휑하고, 일그러지고, 창백한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막내 아가에게 주려고 싸구려 장난감을 풀어 보이며 눈물 짓는 가여운 모습.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깊게 떠올려 보는 것이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게 시 ?내 마음속의 모든 슬픔을?의 전언이다. 시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의 깊이를 비유를 통해 드러낸다. 예수가 비유로써 설교한 것처럼 우리는 비유를 통해 서로의 경험들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신이 경험한 슬픔의 최대치에 견주어 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가장 큰 슬픔은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는 슬픔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봄날의 심장

봄날의 심장 -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며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 사는 소식조차 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사, 2015. 송곳니처럼 뾰족한 싹들이 땅을 뚫고 솟아나는 봄 들판의 초록 풍경은 혁명의 서곡(序曲)을 보는 것만 같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의 근육을 이완시켜 모든 생명들을 춤추게 만드는 봄의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혁명의 두근거림처럼 뜨겁고 아찔하다. 조만간 저 싹들이 피워낼 꽃과 향기의 시간을 어떻게 향유하며 살아가야 할까? 흔히들 사계(四季)를 인생에 비유한다. 씨앗이 발아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시드는 계절의 흐름이 삶의 여정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비유를 하게 된 것이라 이해된다. 그러나 그 비유는 결정론적이다. 봄은 청춘의 시간이고 겨울은 노년의 시간이라는 확신적 짐작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동의할 수도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비유는 유사함의 징후일 뿐이다. 삶은 비유를 넘어서는 기적의 연속이다. 그러나 삶의 기적을 비유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기도 하다. 마종기 시인은 그것을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이라고 말한다. 기적의 연속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다. 마종기 시인은 살아있음의 기적을 봄날의 심장으로 비유한다. 봄날은 청춘의 한 때를 지시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내재된 생의 의지를 의미한다. 청춘은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모든 것이 들썩이는 격동과 절정의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런 시절엔 죽고 사는 소식조차 가볍고 어리석다. 가볍고 어리석었기에 돌아보면 속상한 것이 청춘이다. 그러나 삶이란 속상함만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다. 심장을 비벼 다시 피가 돌게 해야 한다. 여러 개의 봄으로 어쩔 줄 몰라 기절했던 그 시간을 변형시켜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마종기 시인은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어느 해였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언제나 함께 뛰고 있었던 봄날의 심장을 비벼 삶의 매순간을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당부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숨 가쁘지만 침착하게 꽃을 피우는 봄날의 기적이 아닐까?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모슬포 가는 까닭-제주시편 1

모슬포 가는 까닭 -제주시편 1 - 송재학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벋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따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 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열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민음사, 2007년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슬픈 일을 당하거나 고통에 시달릴 때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도피(逃避)의 행로는 즐겁지 않다. 무겁고 침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망이나 도피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라는 자신의 책에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 나오는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삶에 있어 때론 도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송재학 시인의 시 모슬포 가는 까닭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모슬포로 가는 이유와 심정을 밝힌다. 할 말 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가 눕겠다는 다짐은 지루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뭍의 일상으로부터 도주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가늠된다. 도주의 장소가 모슬포인 까닭은 철저하게 뭍으로부터 고립되겠다는 강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심정으로 고요가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마음 안쪽에서 솟구치는 격렬을 억누르지 못해 화자의 감정은 점점 격해진다. 그 막을 수 없는 격함의 심정은 비명을 숨긴 모슬포의 길들, 늙은 말의 등뼈처럼 휘어진 해안, 포구로 밀려드는 매서운 눈설레 등의 이미지들을 통해 점점 증식(增殖)된다. 이런 격렬의 감정은 할 말 조차 앗겨 가슴에 쌓인 응어리진 슬픔들의 분출이다. 지루한 뭍의 일상은 내팽개치고, 두 눈을 등대 불빛처럼 밝혀 홀로 바라보는 모슬포의 겨울 풍경. 그곳에서 격렬비열도의 상처를 생각하는 시인의 모습은 해방(解放) 그 자체다. 지루함과 슬픔과 상처로 얼룩진 일상으로부터 과감히 도주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분출하는 해방의 구가(謳歌). 그것이 모슬포로 가는 시인의 까닭이라 짐작한다. 송재학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 영혼이 그 겨울과 엄동설한의 폭풍을 숨기지 않는 것, 이것이 내 영혼의 자유분방함이며 호의다. 내 영혼은 동상조차 숨기지 않는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여분의 사랑

여분의 사랑 - 배영옥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 되었구나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2019.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여분이다. 삶이란 몫으로 태어나 여분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실존의 몫을 부여받고, 그 몫으로 가족과 연인과 친구를 만나며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일생이다. 우리는 삶의 여분이 얼마큼 남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여분을 사는 게 삶이라는 생각의 전환은 대개 어떤 변곡점을 만났을 때 하게 된다. 그 변곡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계기들은 비슷하다. 몹시 아팠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을 했을 경우 우리는 지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여분의 시간은 애절하고 슬프다. 그러나 여분의 간곡함을 앎으로써 삶은 더없이 고귀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앗아가면서 냉정히 흘러간다. 그 냉정함에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배영옥 시인 유고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에 실린 시 ?여분의 사랑?은 시간의 난폭을 살아야 하는 사랑의 운명을 애절히 읊고 있다. 같은 곳에 머물며 서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간이 백날의 고통이 된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일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백날보다 더 긴 시간이고, 서로에게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의 뜨거운 응축이다. 나의 여생이 저 사람 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자신은 벌써 죄인이 되었다는 그 쓰린 마음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심연이다. 그럼에도 막무가내인 저사람의 사랑이 있었기에 백날을 함께 살 수 있었고, 그 백날의 시간을 자신의 모든 일생으로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분의 사랑이 품고 있는 고귀함과 숭고함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게 사랑의 의지다. 막무가내로 다가가는 사랑이 있기에 모든 사랑은 시간의 불가항력을 뚫고 영원히 기억된다. 역설적이지만,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여분의 사랑을 알 때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는 마지막 구절이 더없이 아프고 찬란해 보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태양의 계절

태양의 계절 - 문형렬 마음에 걸릴 것 없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 해도 이제 문을 열어두고 안녕이라고 하자 바람의 경전이여 방랑의 꿈들이여 모든 덧없는 천사들이여 슬픔에 잠긴 그림자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고 말하자 슬픔이 스스로 만들 길로 태양의 계절이 찾아온다고 《해가 지면 울고 싶다》, 기파랑, 2013 한 해가 지고 새해가 밝았다.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의 크기가 달라 마음이 휑하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구분하여 둘의 차이를 좋고 나쁨으로 비교하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이루지 못한 것은 다음에 이루면 된다. 그 간단하고 자명한 이치를 잊고 당장 결과만 측정해 자학에 가까운 반성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사랑은 슬픔의 다른 이름이고, 성공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다. 이처럼 대립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의 몸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사랑만 생각하고 성공만 추구한다. 슬픔과 실패는 애써 피하려고 한다.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인 바퀴의 테두리처럼 사랑의 지점에 슬픔이 있고, 성공의 지점에 실패가 있다. 굴러감으로써 둘은 하나로 살고 그로써 한 곳으로 간다. 문형렬 시인의 시 태양의 계절은 세상의 길을 다 걸어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깊은 잠언의 세계를 보여준다. 마음에 걸릴 것 없는/좋은 시절이 있었다 해도/이제 문을 열어두고 안녕이라고 하자는 첫 연의 구절이 그렇다. 좋은 시절을 곁에 잡아두지 않고 문 열어 보내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더 오래 좋은 시절을 누리고 싶은 게 보편의 심정이다. 그런데 시인은 안녕하며 그 시절을 놓아준다. 잡아 둘 수 없음을 알기에 가게 하는 것, 슬픔이란 바로 그런 일이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불어가는 것이 바람의 경전인 것처럼 삶 또한 그런 도리를 따른다. 방랑의 꿈은 정처 없고 덧없어 보지만 그 끝에는 모든 것이 만나는 태양의 계절이 있다. 그 계절은 슬픔의 오랜 시간이 만든 좋은 시절의 새롭고 아득한 풍경일 것이다. 좋은 시절을 만나려면 슬픔과 실패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슬픔이/스스로 만들 길로/태양의 계절이 찾아온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문득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라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문장이 생각난다. 오랜 시간에 묻어 있는 슬픔의 냄새를 생각하며 한 해를 살아봐야겠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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