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⑤ 교회 속 ‘독립투쟁’ 흔적 고스란히

대성당 앞 광장에는 당시 주민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했던 신앙의 구심점으로 멕시코 가톨릭 신앙의 수호성인인 ‘과달루페의 성모상’ 배너를 왼손에 들고 절규하는 형상의 미겔 이달고 신부의 대형 청동상을 세웠다. 식민시대를 종식하기 위한 독립투쟁 출발지가 이곳이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함이다. 미겔 이달고의 흔적을 둘러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마침 젊은 부부의 혼배 미사가 진행 중이라 잠시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며 화려한 천장의 프레스코 벽화를 감상한다. 중앙에는 나사렛 성지를 형상화해 그렸는데, 나무문으로 들어가면 선과 악 사이의 대립을 형상화했고,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빈 곳 없이 빼곡히 그린 벽화로 가득하다. 교회는 이 지역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6개의 부속 예배당과 다양한 성화, 이젤에 걸린 그림, 금박 제단, 조각상이 배치돼 있고, 작은 기도 공간도 여러 곳에 있으며, 뒤편 2층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파이프 오르간이 배치돼 있어 돌로레스 이달고 시민이 즐겨 찾는 영혼의 안식처다. 아토토닐코 대성당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교회의 영향을 받아 1740년 루이스 펠리페 네리 신부가 설계하고 감독한 작품으로 그의 학문과 교리적 가치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교회는 18세기 누에바 에스파냐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을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교회 내부 평면은 중앙 대성당의 돔 아래 중앙에 제대가 있고, 좌우에는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배치함으로써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를 형상한 전통적인 가톨릭교회 형태다. 주변에는 회랑으로 이어진 교회 부속건물을 배치해 교회 건물과 일체감을 느끼고, 교회 앞 커다란 광장으로 이어진다. 교회 건물 전면 출입문과 시계 탑 그리고 좌우에 배치한 종탑의 석조 부조는 신앙적 의미를 떠나 정교하고 아름다워 거대한 조각 작품을 보는 듯하고, 이런 대형 작품을 구상하고 조각한 그들의 구상과 솜씨에 감탄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교회 내·외부는 다양하고 풍부한 예술성과 작품성을 갖추고 있어 18세기 중반 교회를 설계하고 감독한 루이스 네리 신부와 내부 벽화를 그리고 외부 부조를 조각한 예술인들에게 깊은 찬사를 보낸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④ 멕시코 독립의 시작… 돌로레스의 절규

‘돌로레스 이달고 박물관’은 멕시코 독립 투쟁의 영웅인 미겔 이달고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살았던 집을 개조한 곳으로, 독립 투쟁 당시 화살과 전투 물자를 만드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 전투 장비와 투쟁을 위해 주민을 교회로 부를 때 사용하였던 종이 전시돼 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박물관이라기보다 혁명 당시 소박한 모습을 재현한 기념관이다. 이 도시는 미겔 이달고를 떠나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관이 깊고, 그 표징은 ‘돌로레스 이달고 시의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문장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4개의 삼각형 분기가 하나로 구성돼 있는데, 중앙 상단에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과달루페의 성모상’ 배너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문양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처형되기 전 8년간 사목한 아토토닐코 교회로 간다. 이곳은 1810년 9월16일 주일 새벽 미사에 참석한 600여명의 신자들 앞에서 “증오스러운 에스파냐 사람들이 여러분 선조로부터 빼앗은 땅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정복자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 ‘돌로레스의 절규’를 선포한 교회다. 미겔 이달고 신부가 요란하게 교회 종을 울리며 신자들과 함께 교회 앞 광장으로 나가자 주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지금 곧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라며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원주민의 항쟁을 촉발했다. 그 후 지지자들이 늘어나자 에스파냐 군대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체계적인 전투 장비도 없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 투쟁에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는 원주민과 메스티소 중심으로 혁명군을 꾸려 독립투쟁을 시작했으나, 사회 지도층인 크레올로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항쟁 1년 만에 칼데론 전투에서 패한 후 포로로 잡혀 처형됐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멕시코 반도 남부지역에서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 소속 군인이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821년 코르도바 조약을 끌어내는 초석이 됐으며, 그해 멕시코와 중미지역 나라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미겔 이달고는 훗날 멕시코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멕시코는 그가 ‘돌로레스의 절규’를 외친지 11년 후에 독립이 됐고, 1810년 9월16일은 멕시코의 으뜸 국경일인 독립 기념일로 지정됐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 화폐에는 두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초상과 문장을 새겨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③

산타로사를 떠난 버스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 한라산 높이인 해발 1천980m 조그만 마을에 있는 ‘돌로레스 이달고 시립묘지’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멕시코 국민 가수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의 무덤이 있어 유명한 묘지가 됐고,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팬들이 많이 찾는다.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 여러 나라 묘지처럼 다양한 형상의 석관묘가 가지런하게 배치돼 있고 무덤 주위에는 가톨릭을 상징하는 십자고상(十字苦像)이나 성모상을 묘지에 두고 있다. 하지만 독특한 형상을 한 커다란 묘지 주위에 수많은 참배객이 줄지어 서 있다. 대형 멕시코 전통 모자 솜브레로를 형상화한 이곳은 멕시코 대중가수 히메네스의 묘비다. 묘지에는 그의 어머니도 함께 묻혀 있는 가족 묘지인 듯하고, 독특한 형상의 묘비는 그의 사위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를 기리기 위해 솜브레로를 쓰고 향을 피우는 참배객이 많다. 어느 나라나 유명한 대중 가수의 인기는 죽어서도 대단하다. 이런 이유로 마이클 잭슨의 묘지의 위치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묘지를 둘러본 후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멕시코 독립투쟁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돌로레스 이달고시에 도착한다. 과거 원주민 시대 이름은 ‘코코마칸’이었고, 식민시대에는 ‘푸에블로 누에보 데 로스 돌로레스’였으나 독립 후에는 미겔 이달고를 기려 ‘돌로레스 이달고’시가 됐다. 산길을 내려온 버스는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관’에 도착해 잠시 돌아본다. 마침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데, 200여 년 전 독립투쟁을 토의하는 듯하고, 기념관에서는 학술 토의와 공연도 한다. 과거 주지사 관저였던 건물을 10여 년 전에 개조한 것이라 매우 깨끗하다. 이어 국민 가수 히메네스가 생전에 살았던 집을 개조한 기념관에 도착한다. 당시 그가 화려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규모와 내부 장식은 당시 그가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길을 잡지는 못한다. 참관 통로를 따라 둘러보고 서둘러 ‘돌로레스 이달고 박물관’으로 간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②

배낭여행자라면 대중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괜찮은 선택이다. 10여 분 기다리자 타고 갈 버스가 도착한다. 벤츠 코치에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 20여 명이 탑승했으나 아시아인은 우리 부부뿐이다. 가이드는 오늘 둘러볼 곳과 방문할 명소를 설명한 후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단체가 구성됐으니 지킬 예의와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과나후아토 터널을 지나 구불구불한 산길로 들어서자 구시가지가 멀리 발아래 보인다. 30여 분 달려 첫 번째 방문지인 산타로사에 도착한다. 가이드는 내리기 전에 조용한 시골 산간마을에는 약 1만여 명이 살고, 주민들이 설립한 협동조합에선 이곳에서 생산한 과일이나 열매로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생산해 수출하며, 여행객이 찾아올 땐 현장에서 판매한다고 설명한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달콤한 과일향이 코와 침샘을 자극한다. 대표인 듯한 사람이 영어로 이곳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달콤한 맛을 보라고 권유한다. 상품 소개가 끝나자 각 판매 코너 판매원은 이곳의 또 다른 특산품인 꽃그림으로 장식한 예쁜 도자기에 담아 시식용 딜리셔스(delicious)를 권한다. 판매원은 아시아인을 만나자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이 제품을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바로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한다. 이곳도 우리나라 여행객이 많이 다녀간 듯하다. 여행길에 우리말 인사를 받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발걸음도 가볍다. 여행 중 간식으로 먹을 몇 가지 과일 말림과 땅콩을 골라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다. 과나후아토 시(市) 외곽 해발 1천600여m 고산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 산타로사는 멕시코 선인장에서 추출한 제품과 고산지대에서 생산한 과일로 만든 다양한 딜리셔스와 건강식품을 생산한다. 고산지대인지라 가게 밖 공기는 맑고, 옅은 구름이 끼었어도 상쾌함을 넘어 차가운 기운에 살짝 추위를 느낀다. 마을에는 몇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시골에서 만났던 바로크 양식의 작은 중세 성당이 있어 이곳도 콜로니얼 시대를 피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타로사 산간 마을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암약했던 지역이라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쩐지 스산한 기분이 든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①

어떤 나라든 가슴 아픈 수난의 역사를 안 가진 나라는 없다. 특히 식민 지배를 당한 나라일수록 그 상처는 더욱 깊다. 1519년 막강한 화력을 갖춘 코르테스는 수백의 부하와 11척의 선단을 이끌고 황금을 수탈하러 베라크루스 해안에 상륙해 멕시코 정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테노치티틀란으로 침공해 아스테카의 콰우테목 황제를 살해한 후, 제국을 폐망시키고 식민 지배를 위한 발판을 만들었으며, 그 후 300여년 동안 멕시코는 에스파냐를 비롯한 외세 지배를 받았다. 오늘은 과나후아토 주변에 슬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돌로레스 이달고’를 찾는다. 호텔 매니저에게 둘러볼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그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후아레스 극장 부근에 가면 당일치기 투어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둘러보고 싶은 곳을 골라 선택하면 교통편 걱정 없이 편하게 돌아볼 수 있다”고 알려준다. 어젯밤 화려했던 마리아치의 여운이 남아 있는 극장 길목에 들어선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이 넘치고, 솜브레로를 쓰고 후아라체를 신은 중년 남자가 상품 전단을 들고 다가와 투어 상품을 영어로 소개한다. 에스파냐 언어권이 아닌 여행자를 대상으로 중형 버스를 타고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여러 상품 중 과나후아토 인근의 시골 마을 ‘산타로사’, 멕시코 건국의 아버지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가 태어난 민중혁명의 출발지인 ‘돌로레스 이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아토토닐코 대성당’ 등을 둘러보는 8시간짜리 상품을 택한다. 한 사람당 500페소를 주고 티켓 2장을 산다. 그는 투어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관리인에게 우리 부부를 인계한 후, 다른 여행자를 모집하기 위해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이미 각 나라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들이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린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⑥

과나후아토 역사지구는 과거 원주민들이 은과 금을 캤던 광산지대로 광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에스파냐 콜로니얼 시절 수탈을 위해 침략자가 개발한 아픈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광산이 가져다준 부유함의 산물인 콜로니얼 건축물에서 당시 풍요롭고 화려했던 삶의 흔적을 엿본다. 독립 후 광산 개발을 멈췄지만 당시에는 과나후아토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터널 형태의 수로를 만들었는데 지금 이 지하터널은 구시가지를 보호하고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하차도로 변신해 여행객의 발길을 불러들인다. 여행을 즐기면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도움은 즐겁고 정겨운 여행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처럼 스스로 찾아가는 여행은 기쁨을 채울 수 있고, 체험하며 얻은 만족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되며 여행으로 얻은 행복은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뇌리에 쌓인다. Happiness(행복)의 어원은 Happen(발생하다)이고, happy의 어근인 hap에는 chance(우연), luck 또는 fortune(운·運)이라는 의미가 있다. 어원과 어근을 살필 때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주변에서 일어나고,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얻거나 스스로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 한발 먼저 얻을 수 있다는점을느끼게된다. 출발할 때 과나후아토는 과달라하라에 비하면 작은 도시라 여정을 짧게 잡았으나 쿠바 아바나 인근 핀카 비히아에 있는 헤밍웨이 박물관에서 만난 독일 청년의 권유를 받고 일정을 조정했는데 잘한 결정인 것 같다. 과나후아토에 도착한 첫날 밤 짧은 시간 역사지구를 둘러 보니 앞으로 찾아갈 주변 여행지가 더 기대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 중심이자 여행객에게 인기 있는 우니온 정원은 아름다운 상록수로 감싸져 있고, 중앙에는 키오스크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성 프란시스코 교회가 있었으나 허물고 산티아고 플라자를 지었다. 그 후 1861년에는 벤치와 키오스크를 설치하고 예쁘게 조경해 아름다운 중세 정원으로 탈바꿈됐고 주변 중세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원 주변은 가톨릭 신자들이 즐겨 찾는 ‘과나후아토 성모 대성당’이 있고, 19세기 후반부터 도시 문화를 이끌어 온 유서 깊은 ‘후아레스 극장’이 있으며, 그 뒤로는 역사 지구를 감싼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삐삐라 동상’이 보이는 최고의 명소가 있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는 사시사철 여행객으로 붐비고, 금요일 밤에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파가 넘쳐난다. ‘불타는 금요일’의 여행객들은 중세 시대 마법의 성에서 펼치는 축제에 흠뻑 빠져들고, 그들은 귓가에 감도는 아름다운 마리아치 무리의 선율에 따라 덩실덩실 길거리 춤사위를 펼친다. 주변 레스토랑에는 코와 혀를 자극하는 멕시코 전통 음식과 함께 테킬라를 즐기며 여행의 멋과 맛을 즐기는 멋쟁이가 넘친다.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 중심인 우니온 정원 주변은 콜로니얼 시대 조성한 유럽풍 광장과 거리가 있고, 주변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교회와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곳을 찾는 여행객은 과나후아토에서 만나는 ‘에스파냐풍 중세도시’라고 예찬한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조명 불빛이 밝아지자 역사 지구 전체가 마치 마법의 성으로 변신한다. 거리 곳곳에는 여행자가 넘실거리고, 마리아치 악단의 연주 소리는 밤물결을 타고 출렁이며, 세계 각지에서 이 밤을 즐기려 찾아온 여행객이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 한마음으로 리듬을 탄다. 이곳의 에스파냐풍 건물은 과거 중남미 지역에 산재한 콜로니얼 도시 건축 양식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고, 과나후아토대학 옆 골목길에 있는 라콤파냐 성당과 라 발렌시아나 성당은 중남미에 있는 바로크 건축물의 걸작으로 꼽힌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④

대성당을 둘러보고 마리아치 연주 소리를 찾아 우니온 정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는 길은 이미 여행객이 넘쳐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다. 마리아치의 고향 과달라하라와 멕시코시티 가리발디 광장에서도 이렇게 많은 마리아치 무리와 여행객을 만나지 못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마리아치가 현란한 복장을 하고 여행객들이 흥겨워할 곡을 연주하며 함께 노래와 춤사위를 펼친다. 마리아치 악단 투어 손님을 모집하는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손에 들고 있는 전단을 보여주며 프리워킹 투어 티켓을 사라고 권유한다. 후아레스 극장 주변에는 과나후아토 역사 지구를 돌며 기타 연주와 노래하는 악사들이 있다. 이들은 ‘까예호네아다’라 불리는 과나후아토 대학생 공연 그룹인 ‘에스뚜디안띠나 과나후아토’다. 이들 그룹은 중세 복장을 하고 거리를 거닐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워킹 세레나데’라고도 하는데, 매일 밤 8시 우니온 정원을 출발해 연인의 비극이 담긴 키스 골목 ‘까예혼 델 베소’ 등 과나후아토 구시가지 좁은 골목 이곳저곳을 돌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과나후아토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키스 골목을 마주한 집에 살았던 멕시코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에는 절로 사랑의 슬픔에 빠져든다. 좁은 골목의 발코니에는 과나후아토 출신 광부 청년과 스페인 귀족 출신 여인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며 부모 몰래 밀회를 즐겼으나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한 슬픈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젊은 연인이 서로 껴안고 입맞춤하며 인증 사진을 찍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워킹 세레나데는 에스파냐어로 진행하며, 그들을 따라 걸으며 숨겨진 명소도 구경하고, 수준급 연주와 노래를 감상하는 것도 이곳에서 즐길 거리다. 이 길거리 공연을 즐기려면 공연 초반에 120페소를 부담해야 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③

어둠이 내리자 창밖 어디선가 마리아치의 요란한 악기 소리가 뒤섞여 들린다. 피로도 잊고 연주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라파스 광장으로 나간다. 중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역사 지구 중심에는 에스파냐가 만든 광장이 있고, 주변에는 중세 시대에 지은 오래된 가톨릭교회가 자리하고 있으며 멕시코에서 만난 도시도 예외가 없다. 나지막한 광장 위쪽에는 과나후아토 성모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 안 밝은 불빛이 스테인드글라스에 투영돼 창밖으로 넘치고, 때마침 미사 끝자락 성가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소리 죽여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잠시 뒷자리에 앉아 남은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성당 내부를 둘러본다. 역사지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성모 대성당은 과나후아토시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다. 이 교회는 1671년 건축을 시작해 1696년에 완공했다. 건축 양식은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돼 있고, 내부는 전통적인 가톨릭 양식인 라틴십자가 형상이며 본당·돔·익랑(翼廊)과 두 개의 종탑이 정문 좌우에 있다. 이 교회는 마을 광부들의 성금으로 세웠다. 제대 중앙에는 7세기에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 장인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을 삼나무로 만든 1.15m 크기의 고대 성모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아랍인이 그라나다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이슬람교도들에게 손상될 것을 염려해 지하 동굴에 숨긴 것이 16세기 중반에 발견돼 에스파냐 황제 카를로스 1세에게 넘겨졌다. 그 후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자신에게 보내온 금과 은에 대한 감사 표시로 과나후아토시에 1557년 성모상을 선물했고, 대성당이 완공된 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고대 종교 유물이다. 매년 8월8일 고대 성모상이 과나후아토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②

잠시 대기실에서 비를 피한 후 역사 지구에 예약한 숙소로 가려고 했으나 비가 그치지 않는다. 체크인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버스를 탄다. 한 청년에게 예약한 숙소를 이야기했더니 친절하게도 내릴 곳을 알려줘 쉽게 정류장에서 내린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역사 지구에 들어서자 그쳤다. 중세 콜로니얼 건물을 개조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한 달여간 쿠바와 멕시코 여행길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과나후아토에 5박6일간 머물 계획이다. 호텔에 부탁해 별도로 책상을 침실에 들여놓고, 여행지에서 얻은 자료 정리와 글을 쓰면서 쉬엄쉬엄 주변 명소를 돌아보기로 한다. 과나후아토는 주도(州都)로, 멕시코시티와 과달라하라 중간 지점 산악지대에 있고, 약 5만명이 살고 있다. 과나후아토의 명칭은 타라스코족 언어에서 연유한 것으로 ‘개구리 언덕(Quanax-juato)’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에스파냐 식민 지배를 당하기 이전에는 오토미, 치치메카, 타라스코족이 거주했다. 이곳은 예전부터 원주민 광부들이 소규모 채광을 이어가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즈텍족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채굴된 금과 은 등 귀금속으로 지배층의 장신구를 만들며 살았다. 1548년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초기 이곳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자 누에바 에스파냐 지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수천명의 채굴꾼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세계 최대 은 생산지로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렸고, 역사 지구에는 그 당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식민 지배를 당하던 초기 전반적으로 도시는 커지고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하층민은 가난에 허덕이며 삶은 날로 팍팍해져 갔다. 18세기 말에는 과도한 세금 부과에 저항한 시민들이 생산된 은 중 에스파냐 왕에게 바칠 은 저장고인 카하 레알을 습격하는 일도 발생했다. 과나후아토는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민중 지향적 가톨릭 사제인 미겔 이달고가 1810년 9월에 정부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치렀던 혁명 투쟁의 발원지고, 콜로니얼시대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식민도시로 도시 전체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멕시코 근대사의 중요한 명소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2-①

흥미로운 중세 건축과 마리아치 음악의 고향 과달라하라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해발 2천50m에 있는 과나후아토(Guanajuato)로 가기 위해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 터미널로 간다. 멕시코 시외버스는 등급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고, 터미널 시설과 버스 수준의 차이가 심하다. 출근 시간이 지난 터라 터미널은 한산하고, 주변은 비교적 깨끗하며, 대기실에는 현지인보다 외국 여행객이 더 많은 것 같다. 현지인들은 1등급인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를 이용하는데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 2∼3등급을 주로 탄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안내 방송을 듣고 승차장으로 이동한다. 승차권을 확인한 승무원은 버스 승차장 번호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짐칸에 가방을 싣고 번호표를 받아 버스에 오를 때 점심으로 음료수와 거친 곡물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준다. 버스 내부는 국제선 항공기 비즈니스 좌석처럼 넓고 편의 장치가 잘 갖춰져 있다. 과달라하라에서 란초 카데나와 레온을 거쳐 과나후아토까지는 약 280km다. 도로 사정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비교할 수 없는 일반 국도 수준으로 왕복 2차선이 대부분이라 주행속도를 높이기 어렵고, 교통법규도 엄격해 규정 속도를 지키며 정숙 운행한다. 어제 예약하고 받은 승차권에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는 과속 주행을 하지 않으며 평균 시속 70∼80km로 운행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버스가 과달라하라 시가지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산등성이 길에 오르자 광활한 사막 지형이 끝없이 이어지고, 키 큰 선인장을 재배하는 농장과 자생하는 선인장 군락도 군데군데 보인다. 창밖에 펼친 자연경관을 살피다 보니 왜 할리스코 주가 테킬라의 본고장이 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버스가 빨리 달리지 않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좋고, 색다른 자연환경이 눈에 들어오면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하여 먼 도시 간 이동할 때보다 버스 이동도 괜찮은 것 같다. 과달라하라를 떠난 버스는 4시간 반 정도 지나 과나후아토 신시가지 터미널에 도착한다. 떠날 때 맑았던 하늘이 란초 카데나를 지날 때쯤 잔뜩 찌푸리더니 레온을 지나 과나후아토에 도착하자 굵은 빗줄기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⑥

‘마리아치’의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그중 ‘결혼’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마리아즈(Mariage)’가 마리아치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1860년대에 프랑스군이 멕시코를 통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성대한 결혼식에 불려 간 악사들이 축하객들이 말하는 마리아즈가 자신들과 같은 악단을 의미하는 말인 줄 알고 그 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치’는 기본적인 악단 형태를 의미하지만 음악 장르로도 분류하고, 때로는 멕시코 민속 음악 전반에 걸친 상징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마리아치 음악은 오랜 세월 동안 멕시코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 전통의 볼레로와 더불어 가장 멕시코다운 음악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르에 속하고, 멕시코 전통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라틴 음악을 형성하는 인디오·흑인·백인 음악이라는 세 가지 요소 중 멕시코에서는 흑인 요소는 거의 볼 수 없고, 에스파냐와 원주민계의 두 요소가 섞여 멕시코 음악이 형성됐다. 마리아치 악단은 일반적으로 2개의 바이올린, 1개의 기타와 1개의 울림통이 큰 기타, 하프와 트럼펫 등으로 이뤄진다. 과달라하라에서는 매년 9월 국제 마리아치-차레리아 축제의 차로 챔피언십 대회가 열리는데, 이때는 최고의 마리아치와 차로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과달라하라 중심 역사 지구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퍼레이드에 멕시코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열광한다.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과달라하라는 유서 깊은 중세 건축물이 즐비하고, 침샘을 자극하는 다양한 음식과 감미롭고 낭만적인 마리아치의 매력은 발길을 옮기지 못하게 한다. 여행은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하며 도전하는 것이자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멕시코 최고의 신고딕 양식의 교회를 만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관리인의 도움으로 세기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감상하는 행운이 따랐다. 삶의 시간은 한정돼 있다. 타인을 의식하는 삶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가슴에 품은 영감을 따라 자신의 꿈을 쫓는 용기가 중요하고, 발로 실천하여 그 꿈을 움켜쥐자. 마리아치 거리에서 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아름다운 선율을 흥얼거리며 한 여행객 노부부의 사랑스러운 길거리 춤사위가 뇌리에 아른거린다. 마리아치의 휘파람 소리를 흉내 내며 발걸음을 옮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⑤

역사지구를 벗어나 30여분 걸어 지도에 표시된 마리아치의 고향인 ‘플라자 데 로스 마리아치’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한가한 때라 그런지 띄엄띄엄 마리아치 악단이 눈에 띄나 관광객들이 그들을 찾지 않아 악기 튜닝을 하고 손님의 이목을 끌려고 귀에 익은 곡을 연주한다. 마리아치 거리엔 이곳이 ‘마리아치의 고향’이라는 표지와 상징물이 여기저기 있고, 그들을 상징하는 대형 장식과 예술작품이 길거리 곳곳에 설치돼 있다. 여행객은 기념삼아 장식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려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한 현지인이 다가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김치” 하며 환영한다. 그리고 “멕시코 어디를 여행했고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묻는다. 여행한 지역을 말하자 “원더풀”을 연발한다. “다음 행선지는 과나후아토”라고 하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곳은 과달라하라보다 작은 도시지만 멋진 곳이고, 그곳에서도 마리아치의 활동을 볼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는 친절하게도 이 거리에서 마리아치 활동을 제대로 보려면 어둠이 찾아든 오후 7시 이후가 돼야 한다고 알려준다. 내일 과나후아토로 떠나야 하기에 마리아치 거리에서 화려한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미국 노인 단체 여행객 앞에서 마리아치가 멕시코 출신 3인조 트리오 ‘로스 트레스 디아멘데스’가 발표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라틴음악의 고전 ‘보름달(Luna Llene)’을 연주해 잠시나마 그들의 음률과 화음에 혼을 빼앗겼다가 발길을 돌린다. 마리아치 거리에서 만난 그들의 복장은 통일성을 갖췄으나 그들의 다양한 얼굴 모습은 마치 멕시코 역사와 문화의 근간이 되는 ‘혼성’을 보는 듯하다. 그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숙명으로 탄생한 유사성을 가졌지만 일찍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마리아치라는 문화예술을 개척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④

교회 밖으로 나와 성당과 연결된 회랑과 부속건물을 감상하는데, 관리인은 아쉽게도 오늘은 성당 내부만 개방하고 이곳을 개방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 건축물들의 조화와 일체성을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한층 교회 건물의 미학적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만남과 도움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풍미가 배가되는 경험을 한다. 친절하게 교회 내·외부를 안내해 준 관리인과 기념사진 한 컷을 찍고 역사지구로 발길을 옮긴다. 지도를 보며 과달라하라대학을 거쳐 중세 건축물과 현지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기억의 고리를 엮는다. 가는 길에 왜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많은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콜로니얼 시대 신앙심의 발로로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지배를 위한 착취로 봐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이것 또한 혼성 문화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몇 년 전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길을 걸을 때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교회를 만났고, 폐허가 된 중세 교회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는데, 이곳에서는 폐쇄된 교회는 볼 수 없다. 아직도 멕시코 가톨릭은 남유럽과 달리 그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멕시코는 인구 감소 국가가 아니라 성장하는 나라이기에 모태신앙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호텔에서 아침식사 때 먹었던 여운이 남아 있는 퀘사디아로 점심을 해결하고, 어제 돌아보지 못한 역사지구 서쪽 구역에서 동쪽 구역으로 돌아본다. 반경 2km 안에는 주 정부 청사, 카바냐스 문화연구소, 데고야도 극장, 할리스코의 예술가·음악가·역사적인 지도자를 기리는 기념물, 역사박물관 등 고건축물이 있다. 종교 건축으로는 성 자포판 대성당, 성 이시드로 성당, 성 베드로 성당, 나자렛 예수 성당 등 오래된 중세 교회가 여럿 있다. 교회를 둘러볼 때 콜로니얼 시대 가톨릭 교세를 짐작하기에 충분하고, 규모도 규모지만 역사성이 있는 교회 건물이 즐비한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③

교회 첨탑 4면에 조명을 밝히는 뮤지컬 시계와 차임이 설치돼 있다. 독일에서 제작한 이 시계는 하루 세 번 오전 9시, 정오, 오후 6시에 25개 카리용으로 곡을 연주하고 십이사도와 가톨릭교회 성인 순례자 미니어처 조각상이 등장한다. 카리용의 연주곡은 ‘Ave Maria’와 ‘National Anthem’ 등 종교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이다. 조각된 돌을 벽돌처럼 쌓아 지은 교회 내부는 천정을 바치는 돌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의 환상적인 조화가 매혹적이다. 교회 전면의 장미 문양을 포함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프랑스 Orléans의 Jacques와 Gerard Degusseau가 제작하고 시공에 참여해 1966년에 완성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화가로서 마지막 작품이 됐다고 한다. 평일 오전 이른 시간이라 기도하러 온 몇 사람밖에 없어 호젓하게 성당 내부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데, 교회 관리인이 낯선 이방인을 보고 인사를 건넨다. 한국에서 온 가톨릭 신자라고 하자 ‘성체성사 속죄교회’의 내력을 설명해 주고, 2004년 세계 성체대회 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곳을 찾았으며, 기념으로 성당 밖에 방문 기념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중앙 제대 옆 계단 아래로 따라오라고 손짓해 내려가자 지하 묘소를 둘러보게 했고, 그곳에는 이 교회 건축에 참여한 성직자와 건축설계·시공에 참여한 사람들의 무덤이 엄숙하면서도 가지런하게 묻혀 있다. 밖으로 나와 중앙 제대 뒤편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촬영하자 우측 아래쪽 한구석을 가리키며 사진 찍으라고 하여 줌으로 당겨 그에게 보여주자 바로 그 사람이 이 작품을 만든 작가라고 이야기해준다. 오래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바티칸 미술관 스텐차 델라 세나투라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감상한 적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오른쪽 하단에 화가인 소도마와 그 옆에 검은 모자를 쓴 라파엘로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특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②

지도 한 장을 손에 들고 호텔을 나서자 어제 보았던 과달라하라 대성당의 뾰족 종탑의 황금색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현지인처럼 성당을 향하여 성호를 그으며 눈인사하고,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거리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멕시코 제2의 도시답게 일터로 향하는 출근 시간이라 번잡하고, 비좁은 플라자 유니베르시다드 지하철역 입구는 각기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분주하다. 멕시코에서 지하철만큼 역사와 혼성(mestizale)을 잘 드러내는 장소는 없는 것 같다. 과달라하라대학을 스쳐 지나 걷다가 제법 규모가 큰 ‘성체성사 속죄교회’를 만나 발걸음을 멈춘다. 입구 한편에는 눈에 익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조각상이 눈길을 빼앗는다. 이 교회는 19세기 초부터 급격하게 퍼진 고딕의 복고풍인 신고딕 양식으로 지은 교회로 멕시코에서 유명하다. 1897년 8월15일에 초석을 놓았으나 종교박해와 자금 부족, 국가가 직면한 경제 위기로 인해 혁명 기간 중단됐다가 75년 후인 1972년에 완공됐다. 교회 출입문은 중앙과 좌·우 3개가 있고, 중앙 출입문이 가장 크며 좌·우 출입문은 크기가 같아 가톨릭교회의 정형적인 삼위일체 형상이다. 출입문 위에는 왕관을 상징하듯 뾰족한 삼각 형상의 외형 구조가 있고 그 위에는 각각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교회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그라나딜라 나무로 헤수스 고메즈 벨라스코가 조각했고, 목재 문 중앙에 베니토 카스타네다가 만든 청동 부조가 장식돼 있어 웅장함을 넘어 미학적 아름다움이 넘친다. 전면에서 바라본 교회 외관은 정형적인 신고딕 양식으로 3개의 출입문과 옆에 높은 첨탑이 세워져 있다. 제대 위는 과달라하라 대성당의 원형 돔과 달리 신고딕 양식의 높은 뾰족 첨탑이 세워졌다. 교회 앞 3개의 고막은 바티칸 박물관 전속 디자이너이자 화가인 프란시스코 벤시벤가가 디자인하고 바티칸의 모자이크 장인들이 만들었다. 중앙 고막은 ‘하느님의 어린 양(파스칼 램)’을 나타내고, 동쪽(좌)은 ‘성 타르시시우스’ 서쪽(우)은 ‘성 비오 10세 교황’을 의미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1-①

멕시코를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가 마리아치(Mariachi)다. 대도시 곳곳에서 멕시코 전통곡을 연주하는 유랑 악사 마리아치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멕시코시티 가리발디 광장에서 마리아치 연주단의 길거리 공연을 체험했는데, 그들의 고향은 과달라하라(Guadalajara)라고 한다. 여행자의 눈에 비치는 마리아치 악단의 연주는 단순한 관광 상품처럼 느낄 수 있으나, 멕시코 사람들에게 마리아치는 삶과 함께하는 의미 있는 존재다. 아이의 생일잔치에서부터 연인들에게는 사랑의 세레나데 음악이고, 결혼식 축하 행사에도 마리아치의 연주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비(La Golondrina)’는 장례식 노래로 멕시코 사람들에게 마리아치 음악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며 삶과 함께한다. 이처럼 마리아치 문화는 대가족제도가 뿌리 깊은 멕시코에서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울타리이자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멕시코는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가진 나라였으나 에스파냐에 의해 파괴됐고, 그 자리에는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가톨릭교회가 세워졌다. 침략자에 의해 인종적 문화적 혼혈이 이뤄졌고, 태양신을 믿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갈색의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종교적 변화도 맞았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혼혈 문화와 종교적 변화는 새로운 정체성을 세웠고, 지금은 그 속에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낙천적인 삶을 산다. 이런 사회문화적 변화에서 탄생한 멕시코 음악에는 그들이 빚어낸 사랑·낭만·열정의 가치가 마리아치의 음악 속에 녹아있다. 따라서 마리아치 음악은 멕시코 사람들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⑥

멕시코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거리가 멀어 문화적 교류가 부족하지만, 여행하며 무지갯빛처럼 아름다운 광장 문화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이어 이곳에서도 접한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은 멕시코는 신과 소통을 위해 성가를 부르고, 일상에서도 서로 간의 인간관계는 음악으로 소통하는 듯하다. 메소아메리카 광활한 대지에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멕시코는 인디오의 고대문명과 콜로니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다. 여행 중에 멕시코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내 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귀에 익은 라틴 음악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거리감이 사라지고 그들의 리듬에 빠져 흥에 취한다. 누군가는 ‘발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멕시코’라고 했다. 이렇듯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 못지않게 정열적이고 춤과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사람이 사는 나라다. 오늘도 컬러풀한 매력을 만끽하며 파노라마 같은 밤을 즐긴다. 세월의 실타래가 뒤얽혀 흘러간 시간은 추억 한 조각이 됐고, 가슴 한구석에 애틋함으로 채워진 그 순간은 이제 뇌리에 맴돌다 언젠가는 영겁의 시간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시간은 인생에서 자유를 갖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므로 지금까지 누리며 살았던 인식·습관·통념의 편안함에서 벗어나 흥미진진한 새로운 경험을 찾는 여행을 즐기고 싶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여행에서 새로운 문화 예술을 만나고, 현지인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일상을 보고 느끼며 공감하는 경험이 얼마나 좋을까. 내일은 마리아치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⑤

벤치에 앉아 한 시간 동안 멕시코 음악을 감상한다. 경쾌한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와 시엘리토 린도, 북부 텍스멕스 지역 농장의 노래 칸시온 란체라 등 몇 곡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낯익은 곡이라 따라 흥얼거린다. 멕시코 민요는 인디오와 콜로니얼 문화가 융합됐고, 대부분 매우 빠른 3박자 형식 곡이라 정겹고 흥겨운 리듬의 특성이 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잔디밭에 앉아 연주를 관람한다. 흥을 참지 못한 관객은 정자 아래서 흥겨운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아르마스 광장은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만큼 규모가 크지 않으나 오랜 역사를 가진 과달라하라 대성당과 함께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주변에는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이 즐비하다. 공연 관람을 마치고 경쾌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광장에 어둠이 드리우자 멕시코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은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린다. 주변에는 마리아치의 고향답게 현란한 전통 복장을 한 그들의 라이브 연주가 공원에 울려 퍼지고, 그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객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연주를 이어간다. 레스토랑에서 연인들은 이곳 할리스코 출신인 콘수엘로 벨라스케스가 1941년에 작곡한 마리아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세레나데 곡인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Kiss Me Much)를 들으며 연정을 나눈다. 다른 한쪽에는 결혼식을 마친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멕시코 토속주 뿔케와 테킬라를 마시며 결혼식 축가이자 베라크루스 지역 민요 라밤바를 경쾌한 리듬으로 연주하자 모두가 춤추는 광란의 분위기가 연출된다. 광장 곳곳에는 마리아치와 거리 악사들이 서로 다른 곡을 연주하며 목청 높여 노래 부르지만, 소란하거나 불협화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처럼 음악은 감정이 서로 다를지라도 음의 장단이나 강약이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있어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경쾌한 리듬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들뜨게 한다. 음악의 마력에 빠진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0-④

대성당을 둘러보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한다. 주변은 잘 가꾼 잔디밭과 관목이 있어 도심에서 평온함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다. 광장은 콜로니얼시대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구시가지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블록만 지나면 레스토랑과 전통시장이 있어 현지인이나 여행자가 즐겨 찾는 곳이다. 저녁노을이 드리우자 광장 맞은편에 있는 대성당 첨탑과 돔이 붉게 물들고, 때마침 저녁 삼종이 울리자 길 가던 사람들이 성당을 향해 저녁기도를 한다. 밀레의 만종 풍경처럼 들판은 아니어도 목가적인 신앙심의 표상을 먼발치에서 본다. 아르마스 광장은 역사 지구 중심지로 19세기 후반 지역민들의 회합 장소로 조성했다. 그리고 멕시코를 30년이나 철권 통치한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00ED〉az) 대통령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10년에 연철로 지은 프랑스식 작은 공연 무대가 있다. 이 무대의 각 기둥에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여성상이 장식돼 있고, 광장 주변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아늑한 저녁 시간을 즐기려는 시민과 여행객이 벤치에 앉아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어둠이 내리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광장으로 모여들고, 무대 주변을 전등불로 밝히자 연주자들이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오른다. 20명 남짓한 작은 오케스트라다. 제1 바이올린 연주자가 튜닝하고 있을 때, 중후한 중년의 지휘자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오르자 곧바로 경쾌한 리듬의 라틴곡 연주가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 과달라하라 음악 단체별로 돌아가며 무료 공연이 열린다. 오늘은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날이다. 첫 곡 연주를 마치고 지휘자는 오늘 이 공연을 위해 지원한 단체의 이름을 알리고 고맙다는 오프닝멘트를 한다. 이웃 나라 회사 이름이 귀에 들려 귀를 쫑긋 세웠으나 우리나라 기업은 없다. 기업은 후원하며 간접 홍보 효과를 기대하는 듯하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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