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7-①

일곱번째 에피소드는 ‘차풀테펙 성’과 ‘국립 예술의 전당’을 대주제로 풀어낸다. 중세 유럽의 성은 당시 경제 중심지로 통치자가 머무는 저택이자 소유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건축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적이 침입할 땐 전투 현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총포의 발달로 화력이 막강한 대포를 성이 막아내지 못하자 기사 시대 몰락과 함께 성의 역할도 쇠퇴해 지금은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옛 성’은 여행지에서 둘러보고자 하는 버킷리스트에 포함되는 필수 코스다. 특히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저마다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가 담겨있는 크고 작은 성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어떤 곳은 격조 높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예술성까지 갖춘 곳도 있다. 하지만 북미는 유럽과 달리 성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탐험한 후, 유럽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원주민시대 성은 대부분 파괴됐다. 그리고 그들이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왕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민주주의 국가가 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러나 멕시코시티에 북미를 대표하는 차풀테펙 성(Castillo de Chapultepec)이 있다. 이 성은 잠시나마 근대 멕시코제국 시절 황제의 궁전이었다. 성의 건축은 누에바 에스파냐 시절 총독 베르나르도 갈베스(Bernardo Galvez)의 명령으로 1785년 짓기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쳐 1863년 완공했다. 나우틀어로 ‘메뚜기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차풀테펙 성은 해발 2천325m 멕시코시티 언덕에 자리하고, 이곳은 아스텍 시대에는 신성한 제단이 있었던 곳이다. 성은 에스파냐 식민지배 시절에 착공했으나 공사 도중 왕실에 대항하려 한다는 첩보 때문에 공사가 한때 중지되기도 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⑦

아스테카 문명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고대 도시 테오티우아칸이 붕괴한 뒤 멕시코 북부 지대에 살던 인디오들은 12세기경 그들의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웠다. 그 후 13세기에는 멕시코 중앙고원으로 자리를 옮겨 ‘신이 머무는 도시’이자 호수에 떠 있는 환상적인 도시 테노치티틀란과 상업 도시 틀라텔롤코를 건설했으며, 그들은 두 도시에 태양을 받드는 신전을 지었다. 아스테카 제국의 신앙관은 ‘낮의 태양신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지만,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힘을 잃고 서쪽 지평선에 떨어져 재규어로 변신하여 밤에는 어둠의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그리고 ‘태양신이 생명을 다하면 그들의 세계도 사라진다’고 믿었기에 ‘원기를 잃어버린 태양신이 아침이 되어 다시 독수리가 되어 비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장으로 활력을 주어야 하고, 태양이 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신공희가 필요하다’는 신앙관을 갖게 됐다. 이런 신앙관을 바탕으로 아스테카 제국은 크고 작은 신전과 부속 건물을 세웠고, 인신공희의 흔적은 피라미드 내부에 있는 솜판들리에서 볼 수 있으며, 희생된 제물의 유해는 주변 무덤에서 발굴됐다. 아스테카 제국은 도시 계획과 건축술이 뛰어난 문명국가였지만, 황금 보화를 약탈하러 온 코르테스 일행과의 전투에 패하여 제국의 문명과 건축물들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졌다. 정복자는 파괴한 유적의 돌로 그 자리에 자신들의 교회와 행정관청을 지어 지금은 온전한 아스테카 유적을 볼 수 없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지은 콜로니얼 건축물에서 혼성 문화를 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현장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사유를 통해 인격을 의식화하고, 그 행위의 가치는 그들의 문명화 과정에 이바지하게 된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메소아메리카에서 그들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에스파냐 침략자로부터 자신들을 지키지 못해 제국의 패망과 함께 문명도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혼혈과 새로운 혼성을 통하여 새로운 멕시코의 혼을 이어가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⑤

틀라텔롤코가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힘에 굴복한 이야기에 이어 전한다. 당시 침략자들은 유럽적인 것은 우월해서 지향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원주민적인 것은 열등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는 누에바 에스파냐를 건설하는데 한낱 도구에 불과하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 멕시코에서 그들은 당당한 주인이자 다양한 혼성 문화의 중심이 됐다. 틀라텔롤코에서는 피부 색깔, 몸매, 눈, 머리 색깔, 옷차림 무엇 하나 보편화한 것이 없는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키가 작고 목은 약간 짧고 굵으며 피부는 갈색인 사람, 반대로 키가 크고 피부는 갈색이나 머리카락과 눈썹이 새까만 사람, 피부는 누렇고 희나 머리카락이 노랗거나 밤색인 경우로 푸른색녹색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외모와 체형을 가진 '메스티소'로 오늘날 혼성 문화를 중추적으로 이끌어 가는 현대 멕시코 사람들이다. 어느 쪽 피가 더 많이 섞여 있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 보일 뿐 대부분 혼혈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고, 한 가족 중에서도 서로 다른 인종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멕시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④

틀라텔롤코는 아스테카 제국, 콜로니얼 시대, 현대 멕시코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 지금은 세 문화의 광장(Plaza de tres culturas)으로 불린다. 이곳은 고대 아스테카와 중세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그리고 현대 멕시코가 혼성을 통해 문화적 동질화(Aculturacion)가 이루어진 삶의 현장으로 멕시코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장소다. 이 광장은 건축가 마리오 파니(Mario Pani)가 설계해 1966년에 완공했다. 주변에는 화염의 흔적이 있는 아스테카 시대 신전과 궁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콜로니얼 시대 상징인 산티아고 교회와 산타크루즈 대학 터가 남아있다. 현대 신도시 건축물로는 건축가 페드로 라미네스 바스케스가 1965년에 설계해 지은 흰 대리석의 외교부 청사가 있어 세 시대 건축물이 혼성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틀라텔롤코에는 혼성 문화의 상징 역할뿐만 아니라 멕시코시티에 남아 있는 아스테카 제국의 흔적과 콜로니얼 시대 건축물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고,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다. 세 문화의 광장에는 멕시코가 메스티소 국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기념비가 있다. 비문에는 1521년 8월13일 콰우테목이 영웅적으로 방어하려던 틀라텔롤코는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힘에 굴복했다.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오늘날 멕시코를 이루는 메스티소 민중의 고통스러운 탄생이었을 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③

1521년 틀라텔롤코 전투에서 승리한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제국의 흔적을 없애려고 신전과 부속 건물을 파괴했다. 그 후 멘도사 안토니오 총독과 후안 주마라가 주교는 신전을 부순 돌로 1535년 산티아고 성당(Santiago de Tlatelolco)과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신전 부지 위에 세웠고, 지금도 이 성당은 파란만장한 멕시코 역사를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1536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식 교육기관인 산타크루즈 대학(Colegio de Santa Cruz de Tlatelolco)도 이 돌로 지었다. 대학 설립 초기에는 나우아어와 베라크루스타바스코 지방의 마야어 통역과 번역 중심으로 교육했다. 하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건설의 신앙적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한 교세 확장과 교회가 늘어 본국에서 사제 충원이 어렵게 되자, 크리오요(Criollo)와 원주민 귀족 아들을 선발해 사제와 수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도 했다. 특히 원주민 선교를 위한 사제 양성은 아스텍 지배 계급 중 가장 권위 있는 가문의 남자아이들을 선발해 나우아어 마야어스페인어 라틴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음악 수사학 논리학 철학 토착 의학 등을 라틴어로 교육했다. 틀라텔롤코는 테노치티틀란보다 13년 늦은 1338년에 세웠다. 이곳에도 테노치티틀란의 마요르 신전과 유사한 형태의 피라미드와 궁전이 있었으나 파괴됐고,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의 흔적에서 화려했던 그때를 상상케 한다.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틀라텔롤코 지역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와 궁전 단지를 2009년 발굴 조사했다. 신전의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과 벽 외에도 인신공희로 희생된 사람의 목을 얹어 놓은 해골 기단인 촘판틀리(Tzompantli)에서 두개골 형상의 부조를 발굴했다. 그 외에도 아스텍의 달력과 우주관을 새겨놓은 태양의 돌(Aztec Sun Stone) 부조를 포함해 다양한 유물과 함께 49구의 유골이 안치된 대규모 무덤도 발굴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②

한 나라의 문화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광장과 시장이다.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여론을 확산하기 쉽고,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도 시장이었다. 틀라텔롤코는 아스테카 제국에서 가장 큰 시장을 갖춘 도시였다. 아스테카 제국은 이 섬을 상업 중심지로 발전 시켜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무역 체계를 구축했고, 생필품과 더불어 흑요석 같은 전쟁 무기 재료를 공급함으로써 막강한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틀라텔롤코 섬을 점령한 후 가장 인상 깊은 곳은 광장 주변의 시장이라고 기록했다. 코르테스는 카를 5세 국왕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 도시에는 여러 개의 광장이 있고, 그 광장에는 날마다 시장이 열리고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살라망(Salamanca, 에스파냐 대도시) 대광장보다 크기가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큰 광장이 하나 있는데, 광장 둘레에는 상점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날마다 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물건을 사고팝니다라고 했을 정도로 틀라텔롤코 광장에는 거대한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황금과 보석이 필요했던 코르테스 일행에게는 단지 전설 속 도시 엘도라도(El Dorado)를 찾았을 뿐이다. 이 보고서만으로는 시장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16세기 살라망카 인구가 2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틀라텔롤코 섬에는 살라망카 인구보다 3배 많은 사람이 매일 시장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수치를 토대로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인구와 주변 부족의 유동인구를 고려해본다면 아스테카 제국이 얼마나 거대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6-①

여섯번째 에피소드 타이틀은 틀라텔롤코의 세 문화의 광장이다. 지금의 멕시코시티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만, 아스테카 제국 시절에는 드넓은 호수였다. 아스텍 사람들은 섬의 지형적인 이점을 살려 도시를 건설했고,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는 호수 안 섬 중에서 가장 컸다. 아스테카 제국은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섬과 육지 사이에 단 세 곳만 둑길을 만들어 연결했다. 틀라텔롤코에서 아스텍 전사들은 제국의 운명을 걸고 코르테스의 침략군에 대항해 최후 항전을 벌였으나 열악한 무기와 군사전략의 부재, 동맹 부족의 반란으로 패하고 말았다.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과 달리 틀라텔롤코는 상업 중심지로 아스텍 사람들의 역동적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그 사실은 처절한 시대를 사랑한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작품 틀라텔롤코 시장에서 화려했던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스테카 제국은 1521년 패망하기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멕시코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으나, 코르테스의 손에 철저히 파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처럼 새로운 문명은 기존의 문명을 파괴해야 탄생하는 운명일까. 누에바 에스파냐 건설이 시작되면서 멕시코는 새로운 혼혈(mestizale)의 시대가 출발했고, 그 실상은 틀라텔롤코 세 문화의 광장에서 엿볼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⑥

소칼로 광장 옆에 있는 콜로니얼 시대 전형적인 건물인 대통령 궁 계단 전면에 아스테카와 정복자 시대가 만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작품으로, 매우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것들이 오밀조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 벽화는 지금의 멕시코가 세워지게 된 아스텍과 콜로니얼 두 시대가 만나 혼성(mestizale)을 통해 문화적 동질화(Aculturacion)가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메스티소는 아스테카 제국 이후 멕시코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늘날 아스테카 문화를 이어가는 핵심이다. 어둠이 드리운 소칼로 광장에는 발목에 방울을 달고 짧은 치마에 망토를 쓴 젊은이들이 머리에 화려한 깃털을 꽂고 전통춤을 춘다. 그들이 펼치는 춤사위는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성적인 자극과 거리가 멀다. 대부분 남성인 그들은 아스테카 전사처럼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선조들의 춤사위를 펼친다. 이제 그들은 전사가 아니라 역사를 알리고 문화를 이어가는 문화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여행 떠나기 전에 단편적으로 바라본 멕시코 역사에 대한 시각은 화려한 문명을 가진 국가고, 태양신에게 인간의 심장을 바치는 인신공희 풍습과 피라미드 정도 알았다. 하지만 아스텍 유적지와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콜로니얼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찬란했던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 그리고 메스티소의 탄생과 그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혼성의 현장을 봤다. 여행은 설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 편의 시네마스코프 드라마다. 떠나기 전에는 새롭게 만나게 될 것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설레고, 돌아와서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삶도 여행이다. 오늘도 인생이란 여행길에 추억의 공간에 돌을 쌓고,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⑤

말린체는 비록 정복자 코르테스의 통역사와 정보원 노릇을 했지만, 그녀로서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코르테스의 정부가 됐지만, 이것 또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코르테스에게 말린체의 통역과 원주민 사회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면 에스파냐의 아스텍 정복 역사는 어느 정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 말린체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말린체는 두 시대가 충돌하는 불행한 시점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비련의 여인이다. 멕시코에서 그녀는 부재하면서도 항상 현존하는 사람(El personaje austente siempre presente)이라는 말로 그녀의 이미지를 함축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식민시절 에스파냐 침략자는 하얀 피부를 가진 자신들의 후예 크리오요(Criollo)가 원주민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보다 혈통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멕시코혁명 이후 주인은 이제 메스티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메스티소의 이미지는 혁명 후 급격하게 바뀌었고, 혁명 정부는 메스티소를 통합된 국가의 전형적인 국민상으로 제시하며 새로운 혁명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상징으로 삼았다. 당시 혁명 정부의 지도자들은 원주민의 육체와 백인의 지성이 결합해 원주민의 적자생존 힘과 백인의 적절한 진보 성향이 조화를 이룬 것이 메스티소라고 극찬했다. 교육부 장관을 지낸 호세 바스콘셀로스(Jos Vasconcelos)가 메스티소를 미래 국민문화의 담지자이며 우주적 인종이라고 추켜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④

말린체가 동족을 외면하고 정복자에게 협력한 이유는 자신의 비참한 기억뿐만 아니라 동족과 고향까지 말끔히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료적 논란은 있지만, 그녀는 코르테스의 정부가 돼 인디오 여인과 에스파냐 백인 피가 섞인 최초의 메스티소(Mestizo)인 혼혈아 마르틴(Martin)을 낳았다. 출산 후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코르테스는 정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말린체를 이용했고, 그녀를 정부로 삼아 한동안 옆에 두었을 뿐이다. 코르테스는 정복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 그녀의 역할이 줄어들자, 말린체는 그에게 더는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20세기 멕시코 벽화 운동의 거장 오로코스가 1926년에 그린 코르테스와 말린체라는 작품에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마르틴은 발아래 누워있다. 아들을 외면한 채 말린체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모습은 당시 에스파냐 지배 하에서 신음하는 멕시코를 표현했다고 한다. 에스파냐어로 섞인다라는 뜻을 가진 메스티소는 이제 멕시코의 진정한 주인이 됐고, 말린체는 겁탈당한 여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건국의 어머니라는 역설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게 됐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의 아들 마르틴을 낳음으로써 최초로 메스티소의 어머니가 됐고, 코르테스는 메스티소의 탄생과 생물학적으로 새로운 종족 형성을 상징하는 최초의 인물이 됐다. 따라서 멕시코인들은 좋든 싫든 마르틴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③

말린체는 귀족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와 헤어져 노예 신세가 돼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녔다. 그녀는 힘든 노동을 감내하며 동족으로부터 멸시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러 부족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기회가 됐다. 코르테스가 말린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삶의 고달픔과 인간의 악덕을 체험했을 때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우연처럼 나타난 코르테스와의 첫 만남은 말린체에게는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중요한 변곡점이 찾아왔음을 인식하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말린체는 자신의 달란트인 유창한 마야어를 무기로 코르테스의 통역사가 됐고, 곁에 머물며 조언자이자 정보원이 됐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아스테카 제국 폐망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고, 역사적으로도 지울 수 없는 잘못 때문에 배신자, 변절자, 매춘부로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출신 부족인 나우아족은 강력한 힘을 지닌 여성으로 평가하고, 귀부인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tzin을 붙여 말린친(Malintzin)이라 부르며 상반되게 평가한다. 리엔소(lienzo)는 자신의 작품 코르테스와 말린친에서 우아한 옷을 입은 귀족 기혼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멕시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고독의 미로에서 겁탈당한 말린체는 침략군의 꼬임에 넘어가 원주민의 규율을 어긴 타락한 여성의 상징인물이자 고통 받는 어머니의 표상으로 묘사하며 중립적인 평가를 한다. 디에고 리베라가 고대 원주민 문명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의 전 역사를 담은 대통령궁 벽화에는 당당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정복자, 신부, 전사들 사이에 까만 머리에 원주민 복장을 한 말린체는 코르테스와 사이에 낳은 최초의 메스티소 마르틴을 안고 있다. 멕시코 역사에서 그녀는 비록 충신은 아닐지라도 전환기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②

말린체는 지역마다 다른 원주민 언어를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나우아어와 베라크루스-타바스코 지방의 마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에 코르테스는 그녀를 이 렝구아(나의 혀)라고 부르며 통역을 맡겼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의 정부가 됐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의 통역사가 되어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다녔고, 통역을 위해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됐다. 말린체는 코르테스에게 당시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테노치티틀란과 주변 부족국의 사정을 알려줬고, 족장들이 콰우테목 황제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까지 알려주는 정보원 노릇도 했다. 역사적 사건인 촐룰라(Cholula) 부족의 음모를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밀고하면서 아스테카 제국과 오랜 갈등 관계에 있던 틀락스칼라 부족과 동맹을 맺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코르테스는 말린체를 더욱 가까이 두게 됐고, 에스파냐에 아내가 있음에도 그녀를 정부로 삼았다. 코르테스는 그녀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주변 소국과 함께 테노치티틀란 정복 계획을 세웠다. 1521년 아스테카 제국은 코르테스 침략군 앞에 힘없이 무너졌으며, 그녀는 코르테스의 정복계획에 도움을 주었다. 만약 말린체가 돕지 않았다면 그의 승리는 훨씬 힘겨웠을 것이고, 아스테카 제국은 침략자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역설적인 추론을 해본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①

코르테스와 말린체의 만남 그리고 메스티소의 탄생에 대해 전한다.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는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에스파냐 사람을 말한다. 탐욕으로 가득한 정복자의 공통점은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황금과 보화를 탈취하며, 이교도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사명감을 동시에 지녔다. 코르테스 침략군이 베라크루스지역 타바스코 연안의 한 마을인 포톤찬(Potonchan)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닷가 마을을 차례로 공략할 때 대포와 소총을 본 원주민은 매우 놀랐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에 더 놀랐다. 반은 사람 같고 반은 괴물 같고, 키는 사람보다 훨씬 크고 빨리 달리는 말 앞에서 원주민 전사들은 놀라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다. 부족 추장은 코르테스에게 화친의 표시로 황금 보화와 함께 여자 20명을 선물로 보냈다. 적에게 여자들을 바치는 풍습은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오래된 관습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와 평화의 제스처였다. 여인들은 난생처음 보는 하얀 피부색에 턱수염을 기른 원정 대원의 험상궂은 얼굴에 놀랐다. 하지만 노예 생활로 단련된 말린체는 주변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했으나 코르테스와의 첫 만남은 연인이 아니라 노예와 정복자 관계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⑦

화려했던 아스테카 문명은 에스파냐 침략자에 의해 한순간에 파멸됐다. 코르테스는 황금을 수탈하려고 베라크루스에 상륙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아스텍을 점령했다. 점령 후 기독교도인 에스파냐 침략자 눈에 비친 인신공희는 이해할 수 없는 원시적인 신앙으로 하루빨리 개종시켜야 할 대상이 됐다. 침략자들은 누에바 에스파냐가 추구하는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아스텍의 신전과 부속 건축물을 모두 파괴해야만 했다. 승자가 남긴 당시 자료에서도 원시적인 종교의 야만성을 부각해 자신들의 종교를 정당화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기록은 사라진 아스테카 문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정복자인 에스파냐 문명과 아스테카 문명이 융합해 탄생한 메스티소 문명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됐다. 하지만 고고학계는 유적 발굴과 유물 분석을 통해 아스테카 문명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승자에 의해 기록된 사료의 진위를 재해석해 바로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고대 문명을 찾아 떠난 여행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탐구하는 독서일 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서는 우리와 다른 다양한 문화와 삶을 돌아보며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지에서는 현지인들의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삶의 현장을 만날 수 있고, 우리와는 다르지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돌아와 뒤돌아볼 때 아름다웠던 순간의 추억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샛별처럼 뇌리에 반짝인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⑥

마요르 신전 발굴 과정에서는 아름답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도자기와 도예품이 출토됐고, 화려했던 아스테카 문명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은 신전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태양의 돌은 멕시코국립인류역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아스테카 문명에서 신앙관도 테오티우아칸처럼 그들이 믿는 태양이 생명을 다하면 자신들의 세계도 사라진다고 생각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그 흔적은 신전 벽면에 돌로 두개골을 만들어 붙여놓은 솜판틀리(Tzompantli)에서 찾을 수 있다. 신전 주변에는 크고 작은 신전과 부속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정복 후 이곳으로 건너온 가톨릭 성직자가 남긴 사료에 따르면 원래 대성당 자리에 있던 신전을 부수고 그 돌을 사용해 교회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전 밖 시장 자리에는 이곳이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모형도가 화려했던 그 시절을 알리고 있다. 마요르 신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은 Libreria Porrua 서점 2층 카페다. 이곳은 멕시코시티에서 알려진 장소로 현지인과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식사 때는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식사 시간이 아닐 때는 차를 마시며 신전을 감상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⑤

소칼로 광장 멕시코시티 대성당 옆에는 그냥 스쳐 갈 수 없는 아스테카 문명의 대표 유적으로 1390년에 세운 마요르 신전이 있다. 유적지는 매우 넓은 자리에 다양한 석조건축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에스파냐 침략자에 의해 파괴되어 사라졌다. 특히 틀랄록(Tlaloc)과 우이칠로포츠틀리(Huichilopochtli)라는 피라미드를 파괴한 자리에는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멕시코시티 대성당을 지었고, 이때 태양의 돌도 대성당 앞 소칼로 광장에 묻은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멕시코하면 건조한 대지 위에 선인장과 마른풀 사이로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소칼로 광장 주변에는 아스테카 문명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에스파냐 점령자는 철저하게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했고 호수를 메울 때 수많은 유적이 사라졌다. 마요르 신전을 발굴할 때 석조 건축물의 윗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기단과 계단 일부분만 남아 있었다. 신전은 높이가 60m에 달하는 피라미드 형태로 기단 위에 계단을 쌓고 층을 달리하여 또 하나의 계단을 쌓아 올린 형태로 지금은 기단과 계단 등 석조 구조물 일부분만 남아 있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는 눈언저리가 붉은 신들의 조각상이 여럿 남아있고, 피라미드 바닥과 중간의 평편한 부분은 살짝 기울어져 있으나 제단 주변에는 양각 새김위에 붉고 푸른색으로 칠한 문양이 있다. 이곳도 문명을 달리하고 있으나 테오티우아칸의 신전처럼 인신공희가 치러졌던 곳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④

아스테카 문명을 대표하는 태양의 돌(Aztec Sun Stone)은 달력과 우주관을 기록한 거대한 원형 석조물이다. 아스텍 달력이라고도 하는 이 돌은 목테수마 2세가 1479년에 만들어 마요르 신전에 바쳤으나 에스파냐 침략자가 이곳을 점령한 후 유적을 파괴할 때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앞 소칼로 광장에 파묻었다. 태양의 돌은 그 후 270년도 넘게 땅속에 있었으나 1790년 12월17일 광장 터 고르기 작업 중에 발견함으로써 당시 세계 이목이 쏠렸고, 이 돌은 지름 3.58m, 두께 0.98m, 무게 25t에 달하는 거대한 석조 유물로 고대 아스텍 사람들의 역법(曆法)과 신앙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태양의 돌은 원반 형태의 큰 바위를 맷돌처럼 다듬고 질서 정연한 구획 안에 신비로운 상징을 정교하게 조각해 아스텍의 수준 높은 문명을 표현하고 있다. 돌에 조각된 부조의 아름다움과 색채의 조화는 고고학적 가치를 떠나 미학적 예술성도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평가한다. 태양의 돌에는 다양한 상징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 있다. 석판 한가운데 혀를 내민 인물의 상징은 현세를 창조한 제5의 태양신이고, 두 손을 양쪽으로 내밀어 쥐고 있는 것은 인간 심장으로 인신공희를 상상할 수 있다. 제5의 태양을 둘러싼 네 개의 네모 안에는 제1시대 야수 재규어ㆍ제2시대 바람의 신 케찰코아틀ㆍ제3시대 불의 신 틀랄록ㆍ제4시대 물의 여신 찰치우틀리케 문양이 각각 조각돼 있다. 이 표현은 현세가 오기까지 지난 과거 4개 시대는 야수와 태풍, 화재와 홍수로 멸망하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바깥쪽에 사각형을 둘러싸고 있는 원 안에는 아스텍의 한 달을 상징하는 20개의 칸이 있고, 그 속에는 그날을 상징하는 동물과 식물 등을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은 그날을 점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가장자리에 있는 원은 시간을 표시한다. 여섯 개의 원 안에 새겨진 기호와 상형문자는 안토니오 레온 이 가마(1792), 알렉산더 폰 훔볼트(1816), 에두아르도 셀레르(1904), 헤르만 바이어(1923), 엔리케 후안 팔라시오스(1943) 등이 연구했다. 그러나 태양의 돌에 남겨진 신들에 대한 기호와 상형 문자 해석은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현세인 제5 태양의 상징은 지진으로 무너진다고 주장하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12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종말론이 아스텍 역법에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제5 태양이 지배한 세계는 1519년 4월 21일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점령함으로써 이미 무너졌기에 이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③

코르테스 원정대는 아스테카 제국의 막강한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고, 그들 자신도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한 후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원정대에게 콰우테목(Cuauhtemoc) 황제는 전통에 따라 축하연을 베풀어 그들을 환영하고 황금과 보석까지 선물했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코르테스 일행은 그날 축하연에 참석한 아스텍 지도층을 몰살하고, 황제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진영에 머물게 했으나 실제로는 볼모로 감금됐다. 그 후 코르테스 일행의 의도를 파악한 아스테카 제국은 군사력으로 테노치티틀란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황제는 목숨을 잃었고, 그의 죽음은 제국이 폐망하는 데 실마리가 됐다. 황제 목테수마 2세의 흉상 사료에 따르면 코르테스 원정대는 테노치티틀란에서 퇴각할 때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싸움보다 많은 황금을 가지고 탈출하다 호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각 때 목숨을 건진 코르테스와 살아남은 부하들은 쿠바로 돌아가지 않고 아스테카 제국에 반대하는 주변 소국과 연합해 테노치티틀란을 다시 공격했다. 결국 아스테카 제국은 코르테스의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전쟁은 3개월 동안 계속된 전투에 패했고, 설상가상 천연두가 퍼지면서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알라메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국립예술궁전(Palacio de Bellas Artes)에는 멕시코 독립 영웅 디에고 리베라 못지않은 실력과 명성으로 벽화 운동에 동참했던 화가 다비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의 콰우테목의 고통이란 작품이 있다. 멕시코 벽화 미술의 거장 시케이로스는 코르테스 일당에게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임당한 콰우테목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고, 현재 이 작품은 국립예술궁전에 소장돼 있다. 그림에는 황금의 행방을 묻는 코르테스 일당에게 고문당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황제의 의연한 자세와 주변 일당들의 모습을 시케이로스의 화법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투구와 철갑으로 무장한 정복자와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사냥개 앞에서 황제는 장작불 고문을 당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처참하게 고립됐어도 끝까지 황금이 있는 장소를 말하지 않는 영웅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의 옆에는 눈물을 흘리며 빌고 있는 신하가 대비적으로 배치했고, 무장한 정복자들은 금속 덩어리로 묘사해 비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급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역사관을 담은 시케이로스의 이 작품은 멕시코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②

16세기 초 에스파냐 젊은 남자들은 갓 발견한 신대륙에서 일확천금을 얻으려 너도나도 대서양을 건넜고, 그중에는 메데인 출신 하급 귀족 코르테스도 있었다. 신대륙에 도착한 원정대는 황금 때문에 수많은 피를 흘렸고, 신대륙도 황금에 눈이 먼 그들의 손에 무참하게 파괴됐다. 정복 후에는 식민과 혼성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1511년부터 쿠바에 머물던 젊은 코르테스는 늘 황금에 대한 열망에 빠져 있었다. 그때 서쪽으로 가면 황금으로 뒤덮인 테노치티틀란이 있다는 소문을 듣자 그의 피는 끓어올랐다. 마침내 코르테스는 1519년 수백의 부하와 11척의 선단을 꾸렸고, 그는 황금을 수탈하려 베라크루스 해안에 도착했다. 해안에서 코르테스 원정대의 선단을 처음 본 원주민은 움직이는 산이라고 표현했고, 말 타고 달리는 기병대를 난생처음 보고 괴물이라고 불렀다.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를 악령의 소리라 했고, 거대한 배와 말 그리고 화포와 소총을 처음 본 원주민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케찰코아틀 신이 부활했다고 믿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신화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아스테카 제국에 첫발을 들일 수 있었다. 원정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도 수천의 원주민 부하를 얻었고, 그들은 황금을 탈취하기 위해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할 때 원주민을 길잡이로 삼았다. 코르테스 일행은 험준한 멕시코시티 중앙 고원에 도착해 산 아래 거대한 텍스코코 호수 안 테노치티틀란을 바라보고 심장이 멎을 만큼 매우 놀랐다. 원정대에 참가한 카스티요(Castillo)의 탐험 기록에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궁전, 신전, 탑, 그리고 도시를 보면서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아마디스(Amadis)의 전설에 나오는 마법 같았다. 게다가 모든 건물은 석조였다. 병사들은 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썼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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