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날 성묫길에 고향땅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다 궁금한 그 꽃 이름을 큰누님께 물어봤죠. 천지에 흔해빠진 꽃다지 꽃이라고 어언간 두메떠나 산 세월 육십년에 다 잊고 나이만 먹은 노인 하나 서있네. 내세울 얘깃거리 남에게 자랑할 말 수줍게 입다물고 살다간 어머니는 묵정밭 꽃다지 세상 기억하고 계실까. 정행교 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전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미리내 패랭이꽃’ 외 3권
산길에서 마주친 꽃 한 송이 먼 허공을 끌고 온 나와 깊은 지층을 끌고 온 꽃이 이렇게 마주치는 건 신조차 몰랐을 일 어쩌면 우리의 뿌리가 같았을 것 발바닥의 실금이 그 증거 갈라지다 만 뿌리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끝내 주저앉게 만든다는 꽃의 귀는 벌의 붕붕 소리에 팔랑이고 내 발은 땅을 오래 믿는다 꽃은 매일매일 다른 얼굴을 내밀고 꽃도 뒤돌아보았을까 뿌리를 거슬러 반추했을까 신열을 앓고 있는 자줏빛 꽃봉오리, 마그마 같은 것 박설희 시인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슴을 재다’. 한국민예총 수원지부장
아파트 거실 서쪽 모서리에 윤기가 반들반들한 푸른 잎을 지닌 군자란 한 포기가 겸손함으로 자라고 있었다. 수줍음으로 조용히 피어난 꽃의 모습이 순수하게 아름다웠다. 잎들 사이에서 자라나온 꽃자루가 나팔모양으로 피어난 모습이 너무 고와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주황색 꽃잎 안에 가냘프게 솟아난 노란 꽃술이 애처로울 정도로 예뻐서 내 마음속에 군자란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심었다. 배수자 시인·문학박사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등
독백하듯 그랬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눈물 나도록 살아 이유 없이 그냥 눈물 나도록 꽃을 보듯 살면 된다고 했다 봄비가 내린다 들판의 새싹처럼 비를 맞는다 그 누군가가 우산을 편다 나는 우산에 끼지도 못했다 가끔 내 이야기에 고개 끄덕이는 살가운 누군가를 만나면 마치 꽃물처럼 마음이 열리고 향기롭다 독백하듯 누군가가 그랬다 살아볼 만한 세상, 비상하라 그냥 걷다 보면 하늘의 맑음이 너의 길이고 나의 길이라고 이 하늘이 감싸준 꽃의 눈물처럼 향기롭게 살면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고 그랬다 윤금아 시인·아동문학가 2002년 ‘아동문예문학상’ 수상 후 활동 시작. 시집 ‘아버지의 거울’, ‘비단잉어의 반달입술’ 한국문인협회 회원, 재능시낭송협회 회장.
아카시아 꽃잎 하염없이 떨어진다 메마른 하늘 맥없이 바라보며 주름만 깊어가던 할머니 찔레꽃 필 때가 제일 가물 때란다 그믐달조차 메말라 부서지던 봄밤, 하얀 찔레꽃 단비 되어 이 땅을 흠뻑 적시고 김종경 시인 용인 출생. 2008년 계간 ‘불교문예’ 신인상 받으며 등단. 시집 ‘기우뚱, 날다’, 포토에세이 ‘독수리의 꿈’. ‘용인문학’, ‘용인신문’ 발행인.
산에서는 사랑이 힘들다고 말하지 마라 오르는 것이 지치고 힘드니만치 내려놓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느니. 산에서는 슬프다고 울지 마라 산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대신 울어주고 나뭇잎들이 속삭이며 위로해 주나니 햇살이 반짝이는 사이로 바람이 들며 날며 웃는다. 슬프면 아다지오 기쁠 땐 칸타빌레 사랑은 간단하게 심플리체. 정태호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경기지역위원회 회장.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작가상, 주간 한국문학신문 대상, 경기PEN문학 대상 외 수상.
접고 접어도 계속 접어야 할 마음이 남아 있느니 절반은 남은 것인가, 접을 수 있는 마음은 구김이 잘 가는 천 같을까 물기를 빨아들이는 종이 같을까 마음은 어떻게 생겼기에 접고 접어야 하는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마지막 장을 결코 저버릴 수 없어서 열일곱 살 아들의 뇌종양 증세를 이야기하며 엄마는 마음을 접고 또 접고 계속해서 접어도 끝없다고 숨죽여 말한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일 년째 접는 중 박설희 시인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슴을 재다’. 한국민예총 수원지부장
냇가 얼음 치던 아이들 버들피리 불고 강가 기러기 줄지어 고향 갈 때 그대는 봄 따라온다고 했지 냇가 아낙네들 겨울을 빨면 둘이서만 몸 푼 강변 봄 캐러 가자 했지 이른 봄 소소리바람 물러가고 노란 꽃다지 논두렁 소풍 나오면 참꽃 피는 언덕에서 만나자 했지 구자육 시인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 회원. 2022 수원문학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벽에못을치다보면 고분고분 잘 들어가는 녀석이 있는가하면 들어가다 말고 슬며시 몸을 비트는녀석도있어 젊었을적엔그런녀석을보면 저바보좀보게,하고놀렸지만 나이를먹은뒤론그러지않아 남의살을헤집고들어가는게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저랬을까싶거든. 윤수천 시인·아동문학가 1974년 동화 ‘산마을 아이’로 소년중앙문학상 입상. 1976년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수상
솔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왔다 바다가 되고 바다로 가고 파도가 되어 갯바위에 부딪혀 바람이 되고 바람으로 살아 하늘을 우러러 하늘이 되고 구름으로 태어나 다시 구름으로 허공에 흐르는 걸음으로 왔으니 첩첩이 쌓인 허물 훌훌 벗어 알몸 인체 아무것에도 보이지 않는, 보일 수 없는 나도 나인 줄 모르는 길 이복순 2015년 ‘수원문학’ 신인상 당선. 길 위의 인문학상, 수원문학인상 수상. 시집 ‘서쪽으로 뜨는 해도 아름답다’. 수원문인협회·경기여류문학회 회원.
저물녘 어디선가 가만히 날 부릅니다 헐벗은 나무들은 저희끼리 몸 비비고 먼 하늘 개밥바라기 온몸으로 빛납니다 한 그루 나목으로 눈 감고 귀 기울이면 정녕 송두리째 나를 버리라 합니다 텅 비워 빈손 펼칠 때 함박눈 쏟아집니다 천지에 둥근 이름 눈꽃이 피어나고 따스하게 불 지피는 가난한 마음들 고요히 낮은 곳에서 화두 하나 깊어집니다 진순분 수원 출생. 시집 ‘익명의 첫 숨’ ‘돌아보면 다 꽃입니다’ ‘바람의 뼈를 읽다’ ‘블루 마운틴’ 등. 가람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본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일없이 허전한 맘 깊어가는 명절 뒤끝 먼데 하늘 우러르다 젖어오는 눈시울에 어머니 가랑잎 같으시던 옛 모습이 스친다 천엽에 똥 쌔듯이 일도 참 많다시며 일곱 남매 기르느라 아픈 허리 눌러 잡고 흰머리 쓸어 넘기시던 깊디깊은 한숨 소리 어머니 떠나시던 그 나이에 서 보니 멍에인가 내리사랑 비로소 온 깨달음에 이 자리 고단한 무게 추스르며 하늘 본다 김애자 춘천 출생. ‘한국시학상’ 본상 수상. 시집 ‘환승할 역이 없다’ 등 4권.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원.
한해의 끝자락이 매달린 길목에서 가난을 흔들고 서 있는 구세군 손과 겨울나무처럼 서서 흔들리는 붉은 냄비가 외롭다 구세군 하얀 입김에 맥없이 사라지는 소리들 무딘 시간 속 회색빛 거리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덤덤한 표정들 지폐의 얄팍한 두께만큼 양심을 넣고 돌아서는 길 한해의 아쉬움과 쓸쓸함이 포개진 감사의 기도가 검은 옷깃에 매달린다 심평자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잔뜩 움츠린 청춘이 눈 덮인 배추밭으로 들어온다 허옇게 얼어버린 배추들 삭아내리다 남은 잎맥을 겹겹이 끌어안고 저물어 가는 언 땅에 서 있다 한때는 농부의 푸른 꿈이었을 호밋자루에 맺힌 세월을 길게 늘어뜨리고 서서히 냉각되는 젊은 가슴 갈라 터진 농부의 손에 끌려온 덜 익은 삶이 서릿발을 세우며 줄줄이 따라온다 배추의 여린 가슴을 닮은 나이가 포기하지 못하는 그리움 아직은 푸른 속살로 기다리는 것이다 윤민희 오산문인협회 제11대 회장. 시집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 등 3권. 초등학교 교사.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생사의 길에 지금 내가 살아있다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질긴 이승의 삶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스스로 감겨드는 무저항의 저 노을빛 그 빛 속으로 깊어지는 머 언 우주공간 화해의 빛살 한 올 오늘 다시 쓰는 일기 새벽의 향기 품어 어둔 하늘 별무리로 흐른다. 김경숙 ‘한국시학’으로 등단. ‘시인마을’ 동인
속살 드러난 솔길을 바람이 지나간다 가진 잎 지고 난 뒤 비로소 바람이 산을 내려간다 새도 날지 않는다 앙칼진 독백으로 산이 외롭다 뒤돌아보니 숲이 온통 속살 드러내고야 산이 겸손하게 겨울을 맞는다 최복순 화성 출생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시 쓰고 노래하던 시 창작 수료식이 인터넷에 올랐네, 기왕이면 내 얼굴도 사진 한 장 올릴 걸 연륜 지나 늦깎이로 총총이 글을 실어 논다랭이 모 심듯이 내 얼굴 주름살이 행이 되고 연이 된다 세월 먹고 늘어나는 내 삶 속에서 시어들이 고목에도 글 꽃 피운다. 이병희 시집 ‘병원’, 수필집 ‘무중생유’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 마주 보고 있어야 노란 열매 달린다 소나무 한 그루 목수를 만나면 목재가 되듯 인생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열매의 색깔이 달라진다 열매가 맺힐 때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순리를 배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 무엇을 흘리고 가는지 조금씩 흘리는 느낌 당신과 나는 너무 긴 터널을 지나 걸어오다 기어 오고 있다 인생살이 열매가 맺히는 가을날에 흐린 날과 맑은 날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 조각 구름이 된다. 장경옥 시집 ‘파꽃’, 제2회 ‘시인마을 문학상’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독대 위로 감꽃비가 우수수 쏟아진다 제 살갗을 여러 겹 드러내고 있는 감나무 그런 감나무를 꼭 닮은 할머니가 감꽃비를 털어내며 생각을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우리 아그들 주려믄 달큰히야 헐틴디 까치밥 몇 알을 남겨두고 할머니는 소쿠리 한가득 감을 담아 머리에 이고 구부정한 걸음으로 툇마루에 겨우 앉는다 할머니만큼이나 닳아버린 무딘 칼로 감 껍질을 한 시름 벗겨내면 할머니의 손톱엔 온통 노을이 진다. 꼭지 끝에 명주실을 달아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처마 밑에 대롱대롱 감을 널어놓는 할머니는 기억이 들쑥날쑥 할 때마다 곶감에 자신의 지문을 여러 겹 덧입힌다 바람이 성긴 가지 끝을 맴돈다 제때 따지 못한 감들이 장독대 위로 툭, 툭 제 몸을 떨군다 강세희 1985년 충북 옥천군 출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졸업 2022 제11회 정조대왕숭모 전국백일장 일반부 장원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센치함으로 깊어가는 가을 불타는 가을산 단풍 여행 떠나고 싶은 충동 지그시 누르면 스산한 바람 옷깃 여미게 하는 11월 분주하기만 하다 여름에 심어놓은 배추 150포기 소금에 절여 씻고 고춧가루 물들인 무생채 갖은 양념 정성껏 버무리다 잡념도 꺼내 빨갛게 물들인다 이웃사촌들 평상에 둘러앉아 싱거울까 짤까 맛 보며 빠른 손놀림으로 일년 양식 준비 하는 날 모락모락 김 나는 수육 한 점 속배추에 싸서 한 입 넣어주는 정겨움 펄펄 끓어오르는 구수하고 진한 국 냄새 온 집안 가득하다 아직도 시골인심은 살아 숨쉬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김치도 맛깔나게 천천히 숙성되어 간다 인생의 가을 시계 앞에 서성이면서 그렇게 익어가고 싶다 이성란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