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챗GPT 등장과 우리의 길

요즘 Chat GPT가 세계를 휩쓸고 그 발전 속도는 1주일이 10년처럼 보일 지경이다. 스마트폰보다 세계 변화 폭이 더 크리란 예측이다. 이 챗봇의 탄생에는 일론 머스크를 비롯해 아마존이며 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술 발달을 이용해 현재 세계 최고 거부에 오른 사람들이 동참했다. 인공지능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데,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다. 우려에 따른 문제점으로 네 가지만 언급해 본다. 첫째, 일자리다. 10년 전 옥스퍼드대 교수들의 ‘고용의 미래’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702개 직업 중 47%가 컴퓨터로 대체될 공산이 크다. 매체와 기술 발달은 직업의 종류를 바꾼다.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것만으로, 타자만 칠 줄 알아도, 컴퓨터 프로그램만 잘 다룰 줄 알아도 취직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변화로 사라지는 직업들도 많다. 지하철 매표원, 요금소 정산원들은 작은 컴퓨터로 대체됐거나 그러는 중이다. 그런데 챗봇은 논문도 써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통계며 분석 등 거의 모든 일을 한다. 변화 폭이나 정도에서 이전과 비교되지 않으니 대체 가능성이 두 배 이상 뛸지도 모른다. 둘째, 대학에 있으니 논문과 리포트를 이야기해 보자. 옛날 과거시험에서도 커닝이 있었고 학위 논문을 원고지에 손으로 쓸 때도 오자나 탈자까지 그대로 베낀 논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컴퓨터가 나오자 아예 복사-붙이기가 유행했다. 그러자 학계에서도 컴퓨터로 표절 검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젠 챗봇과 챗봇의 대결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셋째, 그간 기술 발달이 결과적으로 인류 전체에 이로움을 줬다. 그 와중에 빈부 격차와 상대적 빈곤도 따라서 커졌다. 아직 무료로 사용하는 챗봇이 있지만, 갈수록 유료화가 될 것이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성능 좋은 챗봇을 이용할 수 없고, 그 결과 경쟁에서 밀린다. 넷째, 인류는 어떻게 될까? 불사를 꿈꾸는 이들이 동면이나 뇌만 살아남는 장치에 대한 상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뇌 역시 생물학적 물질인 이상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제 챗봇에서 보이는 인공지능 발달 속도라면 아마도 기억만을 업로드한 인공지능으로 불사의 꿈을 이루려는 이들이 없을까? 아니면 인간의 두뇌 이상으로 발달한 인공지능의 반란이라는 ‘아이 로봇’ 같은 시나리오는 공연한 걸까? 일단 명확한 윤리 기준을 마련하고 법적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미 로봇 3원칙이라든가 윤리강령 등이 있지만 챗봇 세계의 독과점 방지 장치 강화도 필요하다. 이제 자칫하면 한국 인공지능 사업은 아예 고사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챗봇의 작품에 어느 정도 자기 것이 더해져야 창작물로 인정할지 챗봇의 결과물을 자기 창작품으로 내놓을 때 받게 될 처벌 기준도 분야마다 필요하다. 그리고 빈부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사회복지의 강화와 새 일자리 창출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고라니를 위한 변명

흔히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푸르름이 산과 들을 덮고, 따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대기를 적신다. 짙어지는 녹음을 바탕으로 새 생명이 약동하고 새소리는 풍성함을 더한다. 이 아름다운 호시절에 유독 시련을 겪는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소목 사슴과에 속하는 고라니다. 이 계절은 바야흐로 고라니의 출산철이다. 암컷 고라니는 겨울철 짝짓기 후 6개월간 배 속에 품은 새끼를 5월부터 낳기 시작한다. 어미는 단독으로 새끼를 낳고 기른다. 부단히 먹어야 젖이 나오므로 먹이활동 때에는 새끼를 갈대밭이나 관목지대에 숨겨 놓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독박육아 워킹맘의 속사정을 알 길 없는 시민들은 홀로 숨어 있는 새끼를 우연히 발견하면 야생동물구조센터에 데리고 온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들인 시간과 노력이 결과적으론 납치가 된 셈이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의 구조 고라니 조난 원인 중 22%가 오해로 인한 새끼 고라니의 유괴였다. 홀로 숨어 있는 젖먹이 꼬물이 고라니를 발견한다면 그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지나치면 된다. 고라니는 대표적인 로드킬 희생양이기도 하다. 해마다 전국 도로에서 생을 마감하는 고라니는 6만여마리에 달한다. 고라니의 영어 이름 워터디어(Water Deer)에서 알 수 있듯이 고라니가 선호하는 서식지는 습지, 농경지, 하천변 등 저지대 일대다. 이런 평야지역은 사람도 많이 살고, 도로 밀도도 높기에 고라니는 로드킬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1년 중에서도 고라니 로드킬은 유독 5월과 7월 사이에 많이 발생(40%)한다. 작년에 태어난 고라니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아 헤매는 때여서 도로 횡단 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운전 시 특히 안전속도 준수와 전방주시 주의가 중요한 시기다. 고라니는 전 세계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일부 지역에서만 자연적으로 서식해 분포 범위가 넓지 않다. 중국 개체군 크기는 1만여마리에 불과해 보호받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개체수가 약 70만마리에 이르는 흔하디 흔한 동물이다. 농사짓는 입장에선 고라니 존재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얄밉게도 여기저기 맛있는 부위들만 뜯어 놓아 상품성을 떨어뜨려 놓는다. 때문에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해마다 15만~21만마리가 사살된다. 전적으로 고라니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이 씁쓸한 현실을 달리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고라니는 농민의 피와 땀방울, 자본의 속성을 당최 이해하지 못한다. 잘 가꿔진 밭은 고라니에게는 그저 매력적인 채식 뷔페나 다름 아니다. 더욱이 도시 및 농경지 확장으로 밀려나는 고라니에게 농작물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온다. 한편 고라니 개체수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상위 포식자의 부재에 있다. 이 땅에서 호랑이, 표범, 늑대를 비롯한 대형 육식동물을 몰아낸 건 우리 사람이다. 지금 겪는 환경 문제가 대부분 자업자득이듯 고라니 문제도 그러하다. 우리 원죄는 까맣게 잊고 고라니를 탓하고 증오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사실 고라니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앞서 160만년 전 한반도에 도래했다. 고라니 입장에선 인간이 침입생물이자 유해 생물일 수도 있겠다. 좋든 싫든 고라니를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왔고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공동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개체군 관리 방안, 실효성 있는 농작물 피해 방지 시설 및 피해 보상 확대 지원 등 공존의 방안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K-사슴, 고라니가 앞으로 조금은 덜 잔인한 봄을 맞길 바라며.

[아침을 열면서] 블랙워싱,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이지만...

지난해 대통령선거 결과를 둘러싼 진영 간 승리와 패인 분석은 진행형이지만 대선 담론의 하나에 흔히 ‘PC’로 압축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자리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이나 성별, 종교 등을 이유로 소수자와 약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운동이다. 이는 우리 대선에서 주요 이슈로 다뤄지면서 논쟁이 가열됐으며 앞서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공화당 소속인 도널드 트럼프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어젠다로 작용했다. 당시 트럼프는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수십년 동안 강조되면서 다문화 존중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쌓이긴 했지만 일반 국민, 특히 백인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위선’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음을 간파하고 선거에 적극 이용했다. 반대 진영인 민주당은 이를 ‘전형적인 유권자 갈라치기 수법’이라고 비판했으나 트럼프는 오히려 전통적인 미디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소셜미디어, 선거 유세 등을 통해 정치적 소재 활용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 시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최근 논란이 뜨거운 대중예술 콘테츠의 ‘블랙워싱’과 밀접한 연관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블랙워싱은 과거 백인 배우들이 영화 등 대중예술 주요 장르의 주요 배역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던 미국과 유럽 등 서구 문화예술계의 ‘화이트워싱’ 현상을 빗댄 표현이다. 최근 원작의 줄거리나 설정과 관계없이 흑인 배우가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아지면서 블랙워싱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란은 ‘애니메이션 왕국’으로 불리는 미국 콘텐츠 제작업체 디즈니가 주도하는 모양새다. 디즈니는 얼마 전 OTT로 서비스를 시작한 실사영화 ‘피터팬&웬디’에서 주요 배역을 흑인 배우로 채웠다. 요정 팅커벨역을 흑인 배우 야라 샤히디가 맡는 식이다. 이달 중 개봉할 디즈니플러스 실사영화 ‘인어공주’ 역시 주인공 에리얼역에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등장한다. 원작이 무색해진 이러한 현상에 팬과 전문가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내가 알던 에리얼이 아니다”라는 해시태그 메시지로 블랙워싱을 에둘러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흑인이라고 원작이 백인인 배역을 맡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논리의 반박도 적지 않다. 블랙워싱은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볼 필요성이 있다. 대중예술 업체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특정 인종을 주요한 배역에서 배제하지 않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색인종을 주요 타깃으로 한 마케팅적 계산도 깔려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정치적 올바름’이 일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대중예술 분야에 과도하게 반영돼 불필요한 사회적 논쟁을 유발하는 모습은 지양해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전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요즘 전세 사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뉴스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까지의 비극적 사건들이 이 사태의 끝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전국에서 얼마나 더 많은 전세 사기 사례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혹시 나도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맘 졸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정부 당국과 정치권에서는 연일 전세 사기 피해자를 위한 대책을 마련한답시고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만족할 만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 사태는 원칙적으로 모순적인 구조로 돼 있어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대책이 결국은 전세 사기꾼들을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세는 주택임대차에 관한 개인과 개인 간의 계약이며 일종의 사금융이다. 원칙적으로는 국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워낙 큰 금액이 오가다 보니 국가가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됐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이런 주택임대차와 관련된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전세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유일하게 운용하는 제도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인류 전체를 놓고 봐도 보편적이지 않은 매우 특이한 제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상식선에서 생각해보면 전세는 참으로 이상한 제도다. 임차인(세입자)은 일정 기간 타인의 집을 사용하는 대가로 다달이 소액의 사용료만 지불하면 될 것을 평생 만져보기도 어려운 억 단위의 큰돈을 뭘 믿고 생면부지의 개인(임대인)에게 맡기는 것일까? 심지어 임대인 개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전세 문제가 이렇게까지 꼬이게 된 것은 단순히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에만 매달린 탓이다. 다달이 소액의 사용료를 아끼려고 거액의 돈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기는 행위는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한마디로 소탐대실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최고의 진리를 잊었나? 전세제도가 없어진다고 무주택자의 처지가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전세보다 더 보편적이고 안전하며, 인류 전체를 통해서도 검증된 월세제도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전세제도를 근본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이므로 전세를 강제로 금지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전세는 철저히 개인 간의 거래와 책임으로 한정시키고 국가의 강제 개입을 없애야 한다. 이를테면 전세보증제도를 폐지하고 전세자금대출도 폐지해야 한다. 전세제도가 없어지면 갭투기를 이용한 주택의 가수요가 없어짐으로 인해 부동산 공급이 늘어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고 집값의 하향 안정화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월세도 지금보다 더 싸질 수 있다. 전세제도 퇴출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해 보인다.

[아침을 열면서] 깨어있는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로 성서에서는 집주인이 언제 어디서 와서 볼지 몰라서(마가 13:33-37),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데살로니카 5:6) 같은 말들이 나온다. 저마다 타고난 신분이 있어 그 신분대로 살기만 하던 때인데도 깨어 있기가 저렇게 중요했나 보다. 이제 한 가지 일만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일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졸음운전처럼 한 사람이 깨어 있지 않은 게 그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지구촌에서는 한 나라의 일이 그 나라만의 일로 끝나지도 않는다. 싸움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벌이지만 그 여파는 지구 곳곳에 다 미쳐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사정은 더 어려워진다. 그래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건 자기 책임을 진정으로, 제대로 다해야 한다는 의미란 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길을 잃기도 하고 그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한두 번이 아니라 늘 반복되다시피 한다. 그래서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자기의 원래 위치를 찾지 못해 돌아가기가 힘들 때가 많다. 특히 똑같이 반복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선순환에 들려면 반드시 깨어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제대로 깨어 있지 않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지쳤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고 또 나쁜 습관에 빠졌다는 사실마저 모를 때가 많다. 깨인 눈으로 과거에 어떻게 행동해 왔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 과거의 행동과 지금의 행동이 어떤 관계인지 살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맑은 정신으로 깨어 따져봐야 한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옳고, 내가 하는 행동만 옳다고 알았으리라. 상대 생각과 행동도 그 맥락에서는 올바를 수 있다는 걸 영영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그전까지 답답하고 심지어 울화가 치밀던 일들이 결국은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맥락에서만 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주관적인 일이 돼 버린다. 적어도 깬 눈으로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야만 주관적 혹은 서로 주관적 판단이 가능해진다. 어떤 사람이 원래부터 나쁘거나 좋거나 하는 건 없다.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이 나쁘거나 좋거나 할 뿐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구해주는 은인으로 만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좋은 사람이라도 길을 가다가 내 어깨를 치고 가면 나쁜 사람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풀어갈 때 왜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까라고 기대하면 그것은 절대 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아닌 나의 요구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관계 속에 불편함이 남아 있다면 아직 그 깨달음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깨어 있는가?

[아침을 열면서] 농수로에 대한 불편한 진실

19만3천104㎞.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구 네 바퀴 반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 설치된 농수로 총연장이다(한국농어촌공사 2022년). 농수로는 농경지에 필요한 물을 대고, 쓰고 남은 물을 빼는 역할을 한다. 농수로가 있기에 논에 물을 대 모내기를 할 수 있고 농업인의 땀방울이 더해져 우리의 주식인 쌀이 만들어진다. 즉, 농수로는 한민족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자 중요 농업생산 기반시설이다. 과거 농수로는 흙으로 둑을 쌓아 물길을 만든 흙수로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흙수로를 콘크리트 수로로 개조하는 정부 주도 사업이 진행됐다. 사업은 현재진행형으로 2020년에서 2021년 한 해 사이만 해도 전국적으로 흙수로 1천176㎞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수로는 5천624㎞ 생겨났다. 콘크리트 수로는 여러 강점을 가지고 있다. 통수단면적이 크므로 농업용수의 신속한 공급과 배출에 유리하다. 또 용수 손실률이 적고 유지관리가 용이하다. 하지만 명과 암이 존재하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콘크리트 농수로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는 흙수로와 달리 콘크리트 농수로는 직각 형태다. 시간당 가장 많은 양의 물을 전달할 수 있는 공학적으로 효율성이 검증된 구조이지만 생물들에게는 무덤이 된다. 콘크리트 농수로에 빠진 각종 생물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직각 농수로는 양편의 서식지를 분리시킨다. 이 논과 저 논 사이 콘크리트 농수로가 가로지르면 야생동물은 반대편 논으로 쉽게 건너갈 수 없다. 농촌 경관, 특히 논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농수로는 서식지 이동에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한다. 실제 농수로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농수로를 따라 걸으며 동물의 흔적이나 사체가 있는지를 관찰했다. 연이어 죽음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죽은 지 얼마 안돼 사후경직이 진행 중인 고라니가 농수로 한편에 누워 있다. 백골화돼 뼈만 남은 고라니며 너구리도 나타났다. 말라 죽은 참개구리도 여럿이었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204㎞ 샘플 구간에서 폐사체의 출현빈도는 ㎞당 0.48건으로 나타났다. 사체 유실과 부패를 감안하면 실제 폐사 위험은 더욱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평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동물들의 애꿎은 죽음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 피해 저감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동물이 농수로에 빠졌을 경우 빠져나올 수 있도록 경사진 탈출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전국 농수로에 탈출시설이 설치된 구간은 1% 남짓이다. 적극적인 탈출 시설 확대 설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존 ‘ㄷ’자형 수직벽면보다는 V자형으로 벽면에 비스듬한 경사를 주어 야생동물의 탈출이 쉽도록 농수로를 설치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제 곧 모내기 철이다. 들녘 여기저기서 저수지 수문을 열어 물을 흘려보내며 풍년을 기원하는 통수식 행사가 열리고 있다. 겨우내 봄의 흙은 물을 많이 마실 것이고 무논은 푸르러질 것이다. 오늘도 맛있게 먹는 밥 한 공기엔 농수로의 지분도 상당하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농수로가 뭇 생명들의 안전도 챙기는 정정당당한 구조물로 거듭나면 좋겠다.

[아침을 열면서] 문화예술 콘텐츠 ‘티켓 플레이션’의 양면성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때 초토화됐던 분야는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계와 공연계 등 문화예술 분야에 밀어닥친 충격파는 외부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강력했고, 그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화시장은 관람객이 급감하면서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60~80%의 매출 감소를 가져온 영화관이 수두룩했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영화관 중에는 한동안 문을 닫아야 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연극, 뮤지컬, 대중음악 등 공연계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예술인 긴급 지원금을 편성할 정도로 심각했다. 무대라는 폐쇄된 공간이 유일한 일터였던 수많은 예술인들은 한 순간에 공연 중단과 축소 등의 사태와 마주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연극배우 활동 외에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던 연기자들이 오토바이 배달 업무나 대리운전 등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소식은 새롭지도 않다. 지난해부터 코로나 팬데믹 직격탄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한 문화예술계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2년’이 악몽과 같았을 것이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매출 회복이었을 터. 그래서일까. 영화계와 공연계가 경쟁적으로 티켓값 올리기에 돌입하면서 급기야 ‘티켓 플레이션’(티켓+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대중예술을 대표하는 장르인 영화는 CGV를 시작으로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멀티플렉스 3사가 약속이나 한 듯 가격을 인상해 코로나 이전 대비 영화관 관람료는 평균 40% 가량 올랐다. 상업예술인 뮤지컬은 고가 행진을 갱신할 만큼 티켓 가격이 치솟고 있다. 코로나 이전 최고가였던 15만원이 지난해 11월 ‘웨스트사이드스토리’가 16만원(VIP석 기준)을 기록한 데 이어, 올 들어 ‘오페라의 유령’ VIP석은 19만원에 팔리고 있다. 미국, 유럽 등 남의 나라 얘기로 들렸던 뮤지컬 티켓 20만원 시대가 코 앞에 닥친 셈이다.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연극 무대 역시 고액 티켓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손석구, 박해수, 김유정 등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은 10만원을 훌쩍 뛰어 넘어 최고 11만원(‘셰익스피어 인 러브’ VIP석 기준)을 기록했다. 예술성을 바탕으로 실험적 색깔이 강한 연극도 이른바 ‘스타 캐스팅’의 확산과 대극장 공연으로 대중예술 장르처럼 고급화 흐름이 뚜렷하다. 영화계와 공연계의 ‘티켓 플레이션’의 불가피성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 콘텐츠도 산업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티켓 값 인상은 적자 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티켓 플레이션’이 사회에 미칠 영향도 따져봐야 한다. 티켓 값이 오르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계층은 이리저리 플랫폼을 옮겨 다니면서 무료나 저렴한 콘텐츠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문화적 장벽이 생기게 되고, 문화향유 격차를 불러올 우려가 크다. ‘티켓 플레이션’이 문화적 차별과 불공정으로 이어지게 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침을 열면서] 소멸 위기의 지방, 젊은 노인이 필요하다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수도권 대도시와 비교해 지방의 인구 감소 문제가 사회적 논쟁거리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자체의 법률적 존립마저 보장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곳도 여러 곳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물론 소멸 위기에 처한 지자체들의 자구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도시의 젊은이들을 지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방안을 내놓았고 예산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그 자구노력이라는 것이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대안을 아무리 제시해 봐야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꼴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목표 설정이 잘못됐다고 본다. 현재 지방은 대도시와 비교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만한 경쟁력 있는 요소가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아닌 다른 대상을 선정하고, 그에 맞는 맞춤형 솔루션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대상은 젊은이가 아닌, 젊은 노인들이다. 즉, 대도시에서 이제 막 은퇴한 50, 60대 사람들을 타깃으로 해야 한다. 이들은 라이프사이클로 봤을 때 경제적으로는 가장 정점에 있으면서도 전원생활에 대한 소위 로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지방으로 끌어들이면 이들의 구매력으로 인해 지방의 경제에도 큰 보탬이 될 뿐더러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적절한 프로그램으로 이들의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을 실현시켜 준다면 지방의 활성화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노인들의 지방 정착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농촌 3개월 또는 1년 살아보기’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농촌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 그뿐 아니라 지방에 산재한 수많은 빈집을 활용해 주거 문제를 지원하고 ‘초보 농사꾼 양성과정’ 등을 통해 영농인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한편 귀촌을 희망하는 젊은 노인 중에서도 자기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직업적, 기술적 성취도가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살려 지방에서도 같은 분야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할 수도 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있다. 기왕 추진하는 지방 살리기라면 실효성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침을 열면서] 강아지와 동물복지

우리 집 식구에 토피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있다. 평소 내가 놀아주고, 맛있는 간식도 내가 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렇게 일어난다. 그런 풍토에서 교육받고 자라며 사회화됐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물질적 바탕도 중요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성경 말씀이나 유럽의 경우에도 근대와 현대 초반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부랑인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짙었던 것은 자체로 먹을 게 부족한 사정 때문이지 여유가 있는데도 그러진 않았으리라 생각해본다. 물론 복지 대상(노인, 고아, 과부, 빈자, 장애인…)의 확대처럼 꾸준한 노력 없이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이 바뀌기는 어렵다. 그래서 제도를 먼저 바꿔 그런 태도를 고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노예제도 금지, 헤이트스피치 금지법, 차별금지법 등이 좋은 예다. 마음을 다잡고 반성하며 펫(pet) 권리로서의 동물복지를 생각해 놀아주고 먹을 것 챙겨주는 게 식구의 의무이자 토피의 권리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런데도 순간 순간 ‘내가’ 새어 나온다. 이런 우리 세대에 살아있는 물고기를 죽이지 않고 뜨거운 물이나 얼음에 넣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유럽의 동물복지가 받아들여질까? 특히 산 낙지와 살아있는 게,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아는 게 힘이지만 또 병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뒤 낙지며 전복이 살아서 꼬물거리는 볶음이나 탕을 보면 입맛이 달아나고 만다. 환경 보호나 생태 보호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먹고살기 쉽지 않은데 환경이니 생태에 생각이 미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젠 환경과 생태 보호는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왜 그럴까? 세 가지만 언급해 본다. 첫째, 생태와 환경 보호가 필요하게 된 게 바로 인간 때문이다. 인간이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멀쩡했을 터이다. 둘째, 생태와 환경 보호가 생태와 환경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위해서다. 셋째, 결정적으로 법과 제도를 통해 생태와 환경의 훼손을 금지하고 보호를 의무화한 덕이다. 어기면 스스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싫더라도 지켜야 한다. 결국 인간 중심주의가 바탕이다. 그런데 인간이 식물이나 다른 동물보다 더 귀해야 할 과학적 이유는 없다. 지구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이지 식물처럼 모든 생명체의 존재 근거는 아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동물복지를 법과 제도로 못 박아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부정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성경 말씀에 따라 긍정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하나님 모습대로 만들어진 사람이고 모든 피조물의 관리를 맡기셨다. 그런데 그 관리에 소홀했던 걸 반성하면서 적극적인 관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벤담의 공리주의에 따른 철학적 근간인 동물복지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 모두의 관리 대상이지만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생명으로 존중해야 마땅하다.

[아침을 열면서] 반갑다, 저어새야

2008년 겨울 일본 오키나와 북부 얀바루숲을 거닐 때였다. 우거진 아열대숲 가운데서 우연히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고 통성명을 나눴다. 한국에서 왔다니 반가워하면서 ‘Spoonbill’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스푼빌이 무엇인지 되물으니 두 손을 모아 입 앞에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열심히 설명했다. 그제야 숟가락 모양의 부리를 가진 저어새(Black-faced spoonbill)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신문기자인데 겨우내 오키나와에 머무는 저어새를 취재하고 있다고 했다. 차로 돌아와 자신이 찍었다는 저어새 사진을 보여주는데 오른 다리엔 K69라고 적힌 붉은 가락지가 선명했다. 한국에서(Korea) 69번째로 가락지를 달아 보낸 저어새라는 의미다. 바다 건너 타국에서 옛친구를 만난 듯 반가움이 컸다. 훗날 수소문해 보니 2007년 7월 15일 강화도 남단 각시바위에서 가락지를 부착한 녀석이란다. 저어새는 전 세계에서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며 여름에 한반도에서 번식하고 비교적 온난한 대만, 규슈, 중국 남부에서 월동하는 철새다. 멸종위기야생생물 I급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으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레드리스트에서 멸종위기종(EN)으로 분류돼 있다. 1988년에는 관찰된 저어새가 288마리에 불과해 멸종 직전까지 내몰렸다. 접경지대 일대 갯벌과 유도, 비도, 석도 같은 무인도가 저어새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분단의 비극에 의해 남겨진 터전에서 저어새는 겨우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2000년대 들어 저어새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됐다. 저어새네트워크, 인천저어새공존협의체 등 시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모임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저어새 모니터링과 주요 번식지 보전 활동이 펼쳐졌다. 최근 한국가스공사는 ESG 경영의 일환으로 너구리 피해를 입은 남동유수지 저어새 번식지 둘레 울타리 설치를 지원하기도 했다. 관계기관 및 시민들의 보전 노력에 힘입어 다행히 저어새 번식지는 21곳으로 늘어났으며 개체수도 2014년 2천726마리, 2022년 6천162마리로 회복 추세다. 하지만 아직 긴장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 저어새 생존에 가장 큰 위협 요인은 갯벌 매립과 개발로 인한 서식지 감소다. 전 세계 저어새 개체군의 80% 이상이 인천, 경기만에서 태어난다. 저어새는 감각이 발달한 부리로 얕은 물을 휘저어 물고기나 새우 같은 먹이를 구해야 하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 갯벌이 최적의 먹이터다. 송도, 고잔 갯벌이 매립되면서 남동유수지 저어새들의 출퇴근 거리는 늘어나고 있다. 또 무심코 버린 낚싯줄과 바늘이 부리나 몸에 걸려 부상을 입거나 죽는 경우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저어새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한 핵심은 갯벌 보전과 우리들의 지속적인 관심에 있다. 강화 출신 K69는 2008년 이후 여름엔 우리나라에서 번식하고 겨울엔 일본, 대만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러다 2019년 1월 대만에서의 관찰기록을 마지막으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젠 K69의 빈자리를 자식들과 동료 저어새들이 채우고 있다. 올해도 따사로운 봄볕과 함께 저어새들이 2천㎞ 이상을 날아 기어이 고향에 돌아왔다. 번식지마다 둥지 재료를 찾고 모으며 알을 낳느라 정신이 없다. 이제 몇 주 있으면 둥지마다 인천·경기에 본적을 둔 어여쁜 솜뭉치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아비 어미 저어새들은 새끼 먹이느라 더욱 분주하게 부리를 휘저을 것이다. 인천·경기가 품고 길러 멸종 직전에서 되살려낸 우리의 자랑, 저어새를 후손들도 볼 수 있길 바란다. 저어새 보호에 힘을 쏟은 시민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침을 열면서] OTT와 ‘나는 신이다’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대중예술 콘텐츠를 이른바 ‘방구석 1열’에서 시청할 수 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온 역사는 일천하다. OTT의 맏형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2016년으로 10년도 채 안 됐으니 말이다.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채널(종편), 케이블 등 기존 미디어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하고 파격적인 소재의 콘텐츠를 무기로 구독자를 늘리면서 일상을 파고들던 OTT는 언제부턴가 대중예술 담론, 미디어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됐다. 이는 OTT가 대중예술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전통적인 미디어 매체 못지않게 확대됐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오스카)에서 OTT 영화 ‘코다’가 작품상을, ‘파워 오브 도그’가 감독상을 거머쥔 사례는 글로벌 영화산업을 이끄는 주축이 전통의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OTT 업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제작된 영화가 극장이 아닌 OTT 개봉을 택하는 경우가 흔한 현상이 되고 있다. ‘선 극장 개봉, 후 타 매체 상영’이라는 영화 제작 및 개봉의 기본적인 룰이 깨진 것이다. 2022년 ‘드라마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차지한 ‘오징어게임’도 OTT 오리지널 드라마다. 날개를 단 것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던 OTT는 최근 주춤하는 모양새다. 글로벌 OTT와 토종 OTT의 난립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입자 수가 감소하고 있고 일각에서는 ‘위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이러한 OTT를 새삼 주목하게 만든 콘텐츠 하나가 선정성 논란에 직면해 있다.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다. 이 프로그램은 8개의 에피소드로 나눠 성폭력, 살인 등 사이비종교와 교주의 추악한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사실 사이비종교와 교주 관련 프로그램은 다른 매체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다뤘을 만큼 내용적 측면에선 신선도가 떨어진다. 그런데도 유독 ‘나는 신이다’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이유는 콘텐츠의 선정성 때문이다.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알몸 여성들의 음부와 음모가 화면을 채우거나 글로 옮기기도 민망한 성행위 언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부에서 이를 두고 ‘다큐 포르노’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이다’ 제작진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담당 PD는 기자회견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제작 의도를 생각하자면 이번과 같은 형태가 맞는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선정성 논란보다 피해 방지에 초점을 맞춘 제작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나는 신이다’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수용자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OTT 콘텐츠의 선정성 문제를 공론화할 시점이 됐다는 점이다. 지상파 등 다른 방송 매체와 달리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OTT 콘텐츠의 노출 및 표현 수위 등에 대한 논란이 반복되고, 특히 ‘나는 신이다’ 공개 이후 논쟁이 격화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선 곤란하다. 정책 당국은 ‘있는 그대로’를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왕진 가방 든 의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 대도시 이외의 지방에서는 의료인력이 없어 긴급한 환자가 발생해도 적절한 수술을 못 한다거나, 최소한의 의료인력을 확보하려 수억원의 연봉을 내걸고 모집공고를 해도 지원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뉴스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게다가 현재 지방 의료체계에 속한 필수 인력마저 언제든 대도시로 빠져나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니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가 지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턴가 대도시 이외의 지방에 사는 국민은 ‘2등 국민’의 신분이 됐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지방소멸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때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개선하고자 국가에서 공공의사를 추가로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나 기존 의사집단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기존 의사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지방의 국민들을 의료 사각역대로 내몬 최악의 결정이었다. 국가가 의사들에게 배타적인 의료면허를 준 이유는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면서도 국가의 의료 서비스에 적절한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자신들이 챙길 것은 몽땅 챙기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의료 서비스를 국민들에게 골고루 돌려주지 않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왕진 가방을 들고 일반 응급환자를 찾아가는 의사는 옛날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일 뿐이다. 지방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도시에 사는 의사인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읽힌다. 싫으면 너도 의사 되라고? 그래서인지 대입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은 의대로만 몰리고 있고, 심지어 멀쩡하게 서울대와 연고대를 다니던 학생들마저 자퇴서를 내고 다시 의대에 도전한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린다. 그것이 진정 의사들이 바라는 세상인가? 솔직히 의사들에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고 묻고 싶다. 굳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의료인력 통계를 들이밀지 않아도, 그나마 형편이 좋다는 대도시 병원에서도 의사가 모자라 ‘PA 간호사’라는 편법을 쓸 정도로 현재 의료계 인력 부족은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지금 의사들에게 지방으로 가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재의 의사집단이 지방에서 일할 신규 공공 의료인력을 양성할 기회마저 뺏는다면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방에 사는 국민들의 건강을 볼모로 하는 이기적인 행위이며 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지방의 의료공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공론화했으면 한다. 1안은 국가에서 대도시 이외의 지방 의료 사각지역에서 일할 공공의사를 추가로 양성하되 한시적인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며 신분은 공무원으로 하고, 최소 20년의 의무복무 기간을 설정하며, 그 대신 의사 양성에 소요되는 비용을 100% 국비로 지원하는 방안이다. 2안은 대도시 이외의 지방 의료 사각지역마다 주요 거점 병원을 지정해 원격 진료 및 처치가 가능한 최신 장비를 종합적으로 갖추고 원격 의료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안이다.

[아침을 열면서]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젊음은 아름답지만 노년은 찬란하다. 젊은이는 불을 보지만 나이 든 사람은 그 불길 속에서 빛을 본다. 살다 보면 길을 잃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잘못된 점을 돌아보고 원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면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따뜻한 경고의 말이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충격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젊은 세대나 나이 든 세대 모두 지금 처한 상황을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가짐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로운 건 우리에게 일어난 상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해 일으킨 어지러운 상념들 때문이다. 진정 쉬고 싶다면 지금 바로 내 마음을 현재의 시간에 온전히 가져다 놓으면 된다. 이것저것 해야지 하는 바쁜 마음은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상념일 뿐이다. 현재에 마음이 와 있으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지금뿐이다. 지금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하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몫이 있다(to each his own)’라는 격언은 거의 보편적으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대접받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 남을 대접하지 말라(do not treat others as you do not wish to be treated)’라는 격언도 마찬가지다. 이 두 격언은 해석과 적용에서 차이도 있지만 근본에서는 서로 비슷하다. 우리는 진정 타인이 될 수 없기에 타인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기 마음도 다 헤아리지 못하면서 남의 사정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그보다는 그 이해 불능의 사정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으로 남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자꾸 피드백하며 고쳐가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저 사람 몫이 부당해 보이는 건 나의 아상 때문이고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대접하는 방식이 그 사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 방식을 고수한다면 벽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상당 부분 우리 기대가 우리 마음대로였기 때문이다. 그 예기치 못한 일이 우리를 골탕 먹이자고 일어난 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라도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깨기 위해 무던히 노력할 20, 30대와 가장의 무게를 견디며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40, 50대 그리고 절제된 몸짓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할 60대 각자의 입장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길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길이 생기기는 법이니, 걷다가 마땅치 못한 일을 당해도 행복할 권리까지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침을 열면서] 울진 대형산불 그 후 1년

지난해 3월4일의 일이다.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산불이 시작됐다. 남동풍을 등에 업은 불은 삽시간에 동해안 방면으로 빠르게 번져 갔다. 소나무 숲을 태운 불씨는 날아들었다. 이른바 비화(飛火). 도깨기불의 실사판이었다. 불은 남대천, 가곡천, 국도 7호선을 가볍게 넘어 울진 한울원전과 삼척 액화천연가스(LNG) 비축기지를 위협했다. 산림 소실을 넘어 국가적 재난으로 커질 수 있는 다급한 순간이었다. 산불 진화 인력과 장비 투입의 우선순위는 원자력발전소와 LNG기지 수호였다. 소방과 산림 당국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행히 원전 설비 피해 및 방사능 누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후방산불은 잡히지 않고 계속 동진해 낙동정맥 방면으로 향했다. 소광리 일대 금강소나무 군락이 위태로웠으나 3월13일 내린 비로 비로소 불길은 잦아들었다. 진정한 단비였다. 지난해 울진삼척 산불은 발화부터 진화까지 213시간이 걸린 역대 최장기 산불로 기록됐다. 피해 면적은 2만ha로 서울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대 두 번째 규모였다. 주택 319채를 포함해 643개의 시설물이 잿더미가 됐으며 이재민 337명도 발생했다. 산불 이후 곧장 현장을 찾았다. 나무는 숯으로 변해 쓰러져 있었고 바닥엔 시꺼먼 재가 가득했다. 1천도가 넘는 화염에 바위가 쪼개졌으며 대기는 탄내로 가득했다. 숲에 살던 야생동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화마가 덮쳤던 절체절명의 순간이 떠오르며 짧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산불로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이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산불은 곤충과 양서·파충류같이 이동성이 약한 동물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비행능력을 가진 조류와 재빨리 이동할 수 있는 중대형 포유류는 그나마 피해가 적다. 울진 산불 피해 지역은 멸종위기야생생물Ⅰ급 산양의 전 세계 최남단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다만 산양 서식지 일대에는 지표면만 타는 지표화가 발생해 불로 인한 직접적인 산양 폐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불을 피해 살아남더라도 고난은 이어진다. 겨우내 추위와 먹이 부족으로 체력이 떨어진 산양에게 있어 새순이 돋기 전 3월은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시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까지 나버려 산양의 먹이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처럼 산불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야생동물 서식지뿐 아니라 임산자원, 토양 영양물질, 숲의 환경기능 손실을 일으킨다. 막대한 양의 탄소배출로 인해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우려되는 것은 최근 들어 대형산불 가능성과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3월 기온이 높아지고 가뭄이 심화돼 봄철 대형산불 위험이 더욱 커졌다. 앞으로 대형산불은 기후 재난 대비 차원에서 관리하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1년이 지나 다시 산불 위험 계절이 돌아왔다. 대기와 토양이 바짝 마른 봄에는 작은 불씨에도 산불이 발생할 수 있다. 산림청 자료에 의하면 국내 대부분 대형산불은 실화, 방화로 일어난다. 우리 숲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산불 예방에 힘을 보태야 할 때다. 올봄엔 검게 타 버린 침묵의 숲이 아닌, 생명력 가득한 연둣빛 신생의 숲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아침을 열면서]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대중음악, 영화, 드라마 등 대중성이 강한 예술 분야를 지칭하는 대중예술은 순수예술에 비해 산업화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대중예술 산업은 흔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법적으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제2조에서 정의하는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이 정확한 표현이다.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은 가수와 배우 등 대중예술인에 대한 훈련과 지도, 상담 등을 하는 영업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연예인을 발굴 및 육성하고 연예활동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회사를 일컫는다. 언론 매체 등에서는 언제부턴가 이를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중예술 산업에서 K팝을 중심으로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비중과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사실상 기획사 시스템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2000년 이후 SM, YG, JYP 등 이른바 ‘빅3’ 기획사의 독주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BTS(방탄소년단)를 내세운 하이브가 브레이크를 걸면서 외형적으로는 4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매출 규모면에서는 후발주자인 하이브가 1위에 나서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연예기획사의 현주소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 분쟁이 진흙탕 싸움으로 치달으면서 연예기획사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K팝 원조 기획사’로 불리는 SM의 경영권 분쟁 사태는 최대 주주인 이수만 전 총괄프로듀서와 현 경영진 간의 갈등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카카오가 현 경영진과 손잡고 9%대 지분 확보에 나서자 이수만은 경쟁사인 하이브를 통해 자신의 지분 중 14.8%를 인수토록 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폭발하는 양상이다.  여기에 이수만의 처조카인 현 SM 대표이사가 이수만이 해외에 설립한 기획사를 통해 에스파 등 SM 소속 뮤지션의 음원과 음반 수익을 SM과 레이블 정산 전 6%씩 선취함으로써 역외 탈세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수만 측은 법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양측의 싸움이 소송전으로 비화한다면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양측의 법적 다툼 여부와 관계없이 SM 사태는 대중예술 산업, 특히 K팝 등 한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연예기획사의 민낯을 드러낸 사례라고 봐야 한다. 연예기획사들이 아이돌과 걸그룹을 앞세워 K팝을 세계적인 콘텐츠로 키운 성과는 인정해야 옳지만 이 과정에서의 그림자를 돌아봐야 할 때다. 일부 기획사들이 대중음악 콘텐츠 수익을 독점하는 독과점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고 연습생들을 상대로 한 이른바 ‘노예계약’과 인권침해 등의 부작용이 해소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SM 경영권 분쟁은 본질적으로 메이저 기획사 독식 구조의 고착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결과가 가져올 대중음악의 다양성 훼손 논란과 상식적이지 않은 경영 거버넌스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침을 열면서] 현재와 같은 교육감 직선제가 답일까

흔히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이 말이 틀렸다고 나설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를 통해 뽑힌 교육감의 성향에 따라 교육정책이 좌지우지되고 이에 따라 교육현장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또 국민들은 교육감들이 선거법 위반 등으로 감옥에 가는 사례들을 목격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교육이 정치의 희생양이 됐다는 뜻이다. 심지어 조부모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의 성적을 좌우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이란 사람은 한 술 더 떠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란 말까지 내뱉었다.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언제부터 우리 교육의 목표가 이리도 천박해졌을까? 그런데 졸업 후에는 노동자의 신분으로 산업현장에 나서야 하는 고등학교 교과과정 속에 산업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근로기준법’과 기본적인 노동법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교육 당국은 그저 산업현장에서 적당히 성능을 내는 부품으로 쓰일 정도의 인력 양성만을 원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에게 요구하던 바와 뭐가 다른가? 이 모든 것이 교육의 정치화로 인해 생긴 결과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들이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교육의 최고 전문가는 누가 뭐래도 교사들이다. 교사들에게 교육에 관한 재량권이 최대한 주어져야 한다. 현재와 같이 교사들을 각종 규정이나 정해진 틀 속에 가두고 단순한 지식 전수자로 취급하는 환경에서는 교권 확립은 요원하다. 요즘과 같이 스마트한 학생들의 관점에서는 교사들이 학원의 전문강사보다 비교열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교사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반면 학생들에게도 선택권을 줘야 한다. 최소한 중등교과과정 이상에서는 지금처럼 1반, 2반, 3반... 하는 식으로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는 강제적인 교육환경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학에서처럼 원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원하는 과목을 수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학습 의욕이 생겨나거나 강화되며 주도적인 학습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선거로 뽑는다고 해서 교육감의 교육정책에 모든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현재의 교육시스템이 어떤지, 그리고 교육감이 누군지도 모르고 투표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런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정상적인 교육환경을 왜곡할 뿐이다. 차라리 교육감 선거권은 교육현장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 예를 들면 교육 종사자와 학부모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침을 열면서] 그 이후 그렇게

암 수술 이후 재발 여부를 검사 받는 시간, 기나긴 터널 속에서 빛을 보러 달려가는 두려움처럼 춥고 어둡다. 생각보다 길어 빛이 오래도록 보이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수술한 부위가 깨끗하긴 한데 종양이나 자그마한 결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건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돌려보면 살아가면서 전에 없던 무언가가 몸속에 나타났다고 너무 공포에 시달릴 필요는 없지 싶다. 우리 몸에 무엇인가 나타난다는 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나이 들며 얼굴에 기미와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걸 받아들이듯 내 몸 어디든 종양이나 혹 같은 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일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미리부터 건강염려증에 빠져 건강 쇼핑을 하고 돈과 시간을 소비하다 보면 좋아지기는커녕 걱정 탓에 면역력만 떨어져 오히려 없던 병도 생길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다독일 줄 알아야 한다. 숫자놀음에 너무 놀아나서도 안 된다. 일례로 결절이 생기면 암에 걸릴 확률이 10배나 높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상대적 비율이다. 결절이 있는 사람 100명 가운데 5명이 암에 걸리고 결절이 없는 100명 가운데 0.5명이 암에 걸린다는 말이다. 비율로만 보면 10배다. 10배라는 수치에 덜컥 걱정부터 앞선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절이 있어도 100명 가운데 95명은 평생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더 중요한 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암 걱정이 있는 고위험군이라면 남들보다 자주 검사를 받으면 된다. 설령 암이 생기더라도 일찍 발견해서 지켜보다가 수상하면 흉강경으로 제거하면 된다. 중년 넘어 나이 들면서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피하려 안달하기보다 버선발로 나설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목에 주름이 오면서 ‘어느덧’ 하는 소리가 안에서 들리겠지만 그때부터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파 본 사람도 몸에 나타나는 증상이나 검사상의 수치로 불안해하기보다 늘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버릇을 들이자. 루이즈 에런슨의 ‘나이듦에 관하여’란 책에서 보면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현대인이 사방 천지 널렸다. 세상은 고사하고 내 인상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분노하고 낙심한다. 그런데 그게 우리를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든다. 그렇게 한껏 거부하기보다는 노화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나이 듦은 장점이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줄고, 삶의 지혜와 결정권은 늘어나 만족감을 키울 수 있다. 눈이 침침한 건 필요한 것만 보라는 것이고, 이가 시린 건 연한 것만 먹으라는 것이란다. 그러니 이제 그 이후 그렇게 받아들이자.

[아침을 열면서] 계묘년, 토끼 안녕!

“두 눈은 도리도리, 앞다리는 짤막, 뒷다리는 길쭉, 두 귀는 쫑긋하여 완연한 산토끼였다.”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 ‘토끼전’의 한 대목이다. 토끼의 큰 두 눈은 광각렌즈와 같이 넓은 범위를 감시할 수 있다. 짧은 앞다리에 비해 길고 근육이 발달한 뒷다리는 토끼에게 순간적인 도약력을 선물해 줬다. 도망감을 속되게 이르는 ‘토끼다’라는 말은 바로 이 토끼의 뒷다리 힘에 의한 빠른 기동력에서 유래했다. 뾰족 서 있는 두 귀는 주변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달리며 데워진 체온을 식히기 쉬운 구조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핍진한 묘사로 토끼의 생리적 특징을 완벽하게 노래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멧토끼는 토끼목 토낏과에 속하는 포유동물로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이다.  멧토끼의 학명(Lepus coreanus)에도 당당하게 코리아가 붙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산과 들에 흔했던 멧토끼는 사람들의 주요한 사냥감이기도 했다. 겨울철 농한기면 마을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토끼몰이 사냥에 나섰다. 철사가 보급되고 나서는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올무를 놓아 잡았다.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목도리, 귀마개며 장갑을 만들어 썼다. 이처럼 생활밀착형 동물이다 보니 산에 사는 멧토끼는 각종 동요와 설화에 단골 주인공으로 출현하며 문화적, 정서적으로 친숙한 동물이 됐다. 하지만 요즘엔 멧토끼가 좀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센서카메라를 활용한 정밀조사에서도 멧토끼의 출현 빈도는 떨어진다. 흔한 야생동물의 대명사였던 토끼가 귀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서식지 변화다. 초식동물인 멧토끼가 좋아하는 먹이는 풀과 나무 줄기이며, 서식지로는 초지와 관목지대를 선호한다. 한편 우리나라 산림은 난방 연료 변화와 녹화사업에 힘입어 반세기 만에 울창해졌다. 이러한 서식지 조건의 변화로 멧토끼가 설 자리는 점차 감소했다. 그나마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는 시화호 인근과 지리산 노고단 등지에 가면 멧토끼 서식 흔적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한편 유럽이 고향인 집토끼는 구한말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집토끼는 이베리아반도에 사는 굴토끼(Oryctoiagus Cuniculus)를 가축화한 종이다. 분류학적으로 멧토끼와는 속(屬)이 다르며 생태적 특성도 차이가 난다. 집단생활을 하는 집토끼(Rabbit)와 달리 멧토끼(Hare)는 단독으로 활동한다. 집토끼는 굴을 잘 파고 그 속에서 새끼를 낳고 키운다. 새끼는 벌거숭이에다 눈을 뜨지 못한 상태로 태어난다. 이에 반해 멧토끼는 굴을 파지 않고, 새끼는 털북숭이에 눈을 뜬 채 태어나 바로 활동한다. 1990년대 이후엔 집토끼를 육종한 다수 품종의 토끼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에 애완토끼 기르기 붐이 일어났다. 귀엽고 온순한 이미지를 가진 덕에 애완토끼의 인기는 높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귀여움과는 별개로 애완토끼 키우기는 만만치 않다. 체온 조절 능력이 약해 적절한 온습도 관리가 필수적이며, 발바닥 패드가 없기에 바닥은 반드시 푹신한 재질로 마련해야 한다. 이가 평생 자라기에 이갈이를 도와줄 질긴 건초를 수시로 챙겨 줘야 하며, 자주 빠지는 수북한 털을 감당해야 한다. 토끼 기르기 난이도에 절망한 몇몇 이들은 토끼에게 자유를 허한다. “그래 원래 얘들이 살았던 숲에서 마음껏 다니도록 풀어주는 거야”라며 죄책감을 덜어낸 이들은 토끼를 공원에 버린다. 하지만 애완토끼는 품종 개량으로 만들어져 야생에서의 생존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다. 천적과 굶주림, 추위에 노출된 토끼의 최후는 대개 비참하다. 착각과 무지에 의해 낮아진 도덕적 장벽은 토끼를 죽음으로 내몬다. 멧토끼, 집토끼, 애완토끼. 이처럼 각자 삶의 무게를 진 토끼들의 운명은 우리 인간에 의해 많은 부침을 겪었다. 토끼에 대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토끼와의 공존은 가능할지 모른다. 이제 곧 정월대보름 둥근 달이 차오를 테다. 지금껏 달에게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면 이번 계묘년 보름달 옥토끼를 보면서는 한 번쯤 토끼들의 안녕을 빌어 주는 건 어떨까.

[아침을 열면서] ‘이승기 사태’가 마지막이어야 하는 이유

문화산업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대중문화) 관련 산업을 아우르는 ‘빅 키워드’다. 그러나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문화산업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본격적으로 다뤄진 측면이 있다. 독점 자본주의하에서 문화예술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산업으로서 존재한다는 논의가 대두됐던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사회철학자인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것도 이때였다. 문화산업은 그것이 대중에게 미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 등 학문적 논의와는 별개로 산업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국가경제의 주요한 한 축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문화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김대중 정부부터 현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30년이 훨씬 넘도록 문화예술을 산업적으로 발전시키려는 데 재정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로 ‘K콘텐츠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정한 산업생태계 구축’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역대 정부의 이러한 물량 공세 시도는 일정 부분 효과를 발휘했다고 본다. 대중예술 산업을 비롯한 문화산업 전체 규모가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특히 게임과 웹툰 등 온라인 기반의 문화콘텐츠는 비약적 성장이 이어지는 추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춤하긴 했으나 케이팝과 영화, 드라마 등도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성적표를 놓고 본다면 문화산업 분야 종사자들도 자부심을 느껴야 하고 문화산업 시장에 새로 진입하려는 인재들로 북적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최근 ‘이승기 사태’에서 확인된 것은 아이러니다. ‘이승기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배우 겸 가수 이승기와 소속사 간의 음원 정산 분쟁이 원인이지만 본질은 불공정한 문화산업 생태계로 봐야 한다. 스타급 연예인인 이승기에 대한 소속사의 인식이 이 정도인데 일반 대중예술인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연예기획사 등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임금명세서를 주지 않거나, 휴일근로수당도 미지급한 사례가 43건이나 적발된 것은 양적 성장에 치중한 문화산업의 어두운 그늘이다. 음원 수익금 정산을 둘러싼 ‘이승기 사태’의 진실 공방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관건은 ‘이승기 사태’가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산업의 규모의 성장 못지않게 이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숱한 부작용과 허점을 제도적으로 방지할 방안을 정부가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소속사와 예술인 사이에 형성된 위계적 관계를 대폭 개선하거나 계약서 관련 조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법령 정비 등이 그 시발점이 될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말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고 있나’라는 뜻이다. 사람이 수단에 매달리다 보면 정작 목적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조금 다른 표현으로 ‘겨우 잠든 불면증 환자 깨워 수면제 먹이기’도 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의 수준이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와 같은 강한 신념이 개입하면 더더욱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 이럴 때는 한 발짝 떨어져 큰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면 도움이 된다. 필자가 친목 모임에서 만나 알게 된 분 중에 대학 선배이자 목사직을 겸임하면서 모 신학대학의 교수직에 계셨던 손 모 목사가 있다. 2016년 한 개신교 광신도가 모 사찰에 난입해 불당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건이 공중파 뉴스로 전국에 알려진 일이 있었다. 이때 손 목사는 주변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기독교계의 사과문을 온라인에 게시하고 불당의 원상복구를 위한 모금운동까지 주도하셨다. 그런데 종교의 평화를 위해 애쓰신 이분에게 돌아온 것은 신학대학으로부터의 해직 처분이었다. 일부 기독교계의 자성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대승적으로 수용한 불교 측에서 감사와 화해의 강연 자리를 마련했는데 거기서 손 목사는 ‘예수는 육바라밀을 실천한 보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신학대학 측은 이 문구를 문제 삼아 손 목사를 그간 이교를 돕는 배교 행위를 해왔으며 신앙적으로도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해직 처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손 목사의 행위는 종교 평화를 위해 애쓴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판단할 것이며, 타 종교인들에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를 전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의 판단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등법원까지 손 목사는 부당하게 해고당했음을 판결문에 적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신학대학 측은 손 목사의 정상적인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석가탄신일에 조계사 앞에 몰려가 예수 믿으라고 소리치고 찬송가를 불러 뉴스에 나온 적도 있고, 최근에는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현장에 몰려가 이슬람교에서 터부시하는 돼지고기를 굽는 등 타 종교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계는 왜 이리 됐을까? 이는 개신교계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찾는 심각한 자기 모순 상황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목사의 우상화’다. 기독교의 최고 권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서’에 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목사의 설교가 ‘말씀’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성서의 대체재로 치부되는 현상까지 보인다. 아울러 목사 및 목사의 설교에 대한 이의 제기는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오죽하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일반 기독교 신도들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 교회를 선택할 때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찾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서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목사의 설교가 좋다는 평판을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보편화됐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천주교인들은 누구든 집에서 가까운 성당에 다니지만 개신교인들은 집에서 먼 교회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이 다반사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정상인데,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있다. 제발 달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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