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만화 슬램덩크 속 주인공 강백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뱉는 외마디다. 당대 최강 산왕공고와의 일전 중 큰 부상을 당해, 벤치에 머물던 강백호가 출전을 강행하며 남긴 레전드 명대사로, 작품 서사를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다. 감히 감독님을 영감님이라 호칭하는 패기도 기특하지만, 무엇보다 강백호라는 캐릭터에게 부여된 성장 스토리의 마무리를 이토록 훌륭하게 한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표할 뿐이다. ‘슬램덩크’는 첫눈에 반한 짝사랑 소녀의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마법같은 한마디에, 농구를 시작한 풋내기 강백호와 오직 농구를 위해 죽고사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농구라곤 관심도 없던 강백호가, 결국에는 농구에 진심인 바스켓맨이 된다는 이야기다. 비겁한 반칙이나 요행수로 승리를 가져오는 클리셰는 없다. 연애를 다루느라 괜한 시간낭비도 하지 않는다. 오직 10대 고등학생들의 농구에 대한 열정만 존재할 뿐이다.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고 일자리조차 사라져 버린 암울한 현실, 그럼에도 부모찬스라는 미명하에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헬조선’ 대한민국에서 ‘슬램덩크’, 이 네 글자가 주는 감동은 묵직하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가 돼버린 지금,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에 모두가 열광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26년 만에 돌아온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인기가 매섭다. 지난 1월 초 개봉했음에도, 아직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며 누적관객수 35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30, 40 아재들의 추억팔이가 아닌 10, 20대 MZ세대들조차 “엄마아빠가 내 나이 때는 이렇게 재밌는걸 봤구나”면서 극장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문득, 만화 슬램덩크의 엔딩이 떠오른다. 북산고는 전국대회 2차전에서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희대의 명대사와 함께 강백호의 마지막 슛으로, 산왕공고를 간신히 꺾고 3차전에 오른다.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는 단 2쪽 분량으로 북산고의 전국 제패 여정은 급히 마무리된다. 어떤 팀한테 왜 졌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하지만 이토록 불친절한 엔딩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기에, 여기까지 온 그들에게 열광할 뿐, 그깟 패배따위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렇게 헤어진 그들을 26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사실뿐, 더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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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3-03-01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