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령 양우의 산거사요를 원나라 학자 왕여무가 증보·편집한 인천시 보물 산거사요는 4권 1책이다. 이 책에는 산촌에 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알아야 할 네가지 요결을 사항별로 분류해 기록했다. 즉, 총 4요결을 74항목으로 나눠, 각 항목 아래에 해당 사례 및 대증, 처방 등을 서술했다. 간행 시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머리글이나 맺음말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보존 상태로 미뤄 조선 성종 때로 보인다. 이 책은 건강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의서로, 조선 전기 의학서적간행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문화재청 제공
구한말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천주교가 박해시기를 지나 지역에서 어떻게 정착되며 신앙공동체를 꾸려왔는지를 잘 알려 주고 있는 건물이다. 1898년 65명의 신자가 칠울공소를 설립하고 1900년에는 145명의 신도가 이곳에서 생활했고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37명의 신도가 이곳에서 신앙 마을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어 이곳은 성당뿐만 아니라 마을 진입로, 운동장, 조경, 가마터, 칠울공소(현 사제관), 인근 가옥 등 가톨릭 문화와 사적지로 장소적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신응경은 침구(침질과 뜸질)관계를 다룬 전문의학서적으로 성종 5년(1474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1993년 보물 제1180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책에는 머리말이 빠져 있어 손으로 직접 써서 내용을 보충해 넣었다. 또한 본문도 하단이 닳은 부분에 간지(間紙)를 넣어 포개 붙였다. 인조 21년(1643년)에는 훈련도감자판으로 다시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서지학 및 한의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양 상여·회다지소리는 고양시 송포면 대화리 김녕김씨 집성촌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장례의식요다. 조선시대 왕릉 조영의 영향으로 인해 나라님을 밟을 수 없어 광 밖에서 밟는 것에서 유래된 풍속이 있어 고양 일대에서 달구질을 할 때 광중 밖에서 밟는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보존회장 김우규를 주축으로 고양상여회다지소리보존회를 통해 이 종목의 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 인천부 청사는 인천 중구에 있는 건축면적 694.2㎡, 연면적 2천14.7㎡의 건물로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인천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해온 역사적인 곳으로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다. 광복 후부터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한 1985년까지는 인천시 청사로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구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2층이었지만 1964년 3층으로 증축했다. 증기난방과 수세식 화장실 등의 신식 설비가 갖춰져 있어 당시 주목 받기도 했다. 문화재청 제공
청련사 생전예수재는 매년 중양절마다 불교 악가무의 종합예술을 곁들여 불자들이 내세를 위해 성전에 미리 공덕을 짓고 수행하도록 불법으로 이끄는 불교의례다. 2010년 보존회 발족 이후 보존회와 안정불교대학을 중심으로 예수재의 체계적인 전승과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예수재의 활성화를 위해 설행시기를 윤달이 든 해에서 중양절로 조정해 해마다 설행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은 인천 중구에 있는 건축면적 495.87㎡, 연면적 628.1㎡의 건물로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1935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강당이다. 이는 학교 강당의 기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 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 이용해 온 역사적인 장소다. 15m의 너비를 중간 기둥 없이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 기능적인 모습이다. 이 건물은 당시 제물포고등학교 학생들이 애국지사 등의 강의를 들으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후기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통견을 입었으며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내려 각각 검지와 중지를 맞댄 설법인(說法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을 취하고 있어 과도기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크다. 또 이와 같은 양식적 유형의 보살좌상이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데 반해 드물게 금동으로 제작됐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재청 제공
고법(鼓法)은 판소리에서 북 반주의 법례를 의미하며, 2013년 인천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수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엇중모리 등의 다양한 장단을 치면서 소리꾼의 노래를 반주한다. 또 추임새를 통해 소리꾼의 흥을 돋우면서 소리판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판소리에는 예부터 ‘일고수 이명창’과 같이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마검은 동농 이해조가 쓴 작품으로, 제국신문에 1908년 4월25일부터 7월23일까지 연재한 소설을 1908년 12월 대한서림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무당과 점쟁이, 지관 등의 폐해를 통해 미신 타파에 대한 강렬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했다. 포천 출신의 이해조는 신문학을 주창한 인물로 1907년 5월 제국신문 기자로 입사한 뒤 1913년 매일신보에서 퇴사하기까지 활발한 연재 및 작품 발표를 이어가 단행본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청 제공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며,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인천 강화군 망월리에 있는 이 돈대는 40∼120㎝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망월돈대는 숙종 5년(1679년)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며, 방형구조로 둘레 124m, 석벽의 높이는 180~300㎝이다. 기존 돈대와 달리 망월돈대는 갯가 낮은 지대에 설치했지만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없어 경계초소로 부족함이 없다. 남쪽으로 계룡돈대, 북쪽으로 무태돈대가 있다. 돈대와 함께 있는 장성은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의 군사 통신 시설로 총 44기가 있다. 2로 직봉 유적의 제2거는 직봉과 10개소의 간봉으로 이뤄져 있다. 소백산맥의 주요한 영로(嶺路)를 넘는 노선이 모두 봉수로(烽燧路)가 됐으며, 가장 동쪽의 죽령(竹嶺)을 넘는 노선이 직봉(直烽)이 되고, 중앙의 통로인 계립령을 넘는 노선과 보다 서쪽의 추풍령을 넘는 노선이 주요 간봉이었다. 문화재청 제공
용궁사 신중도는 인천 중구 운남동에 있는 1폭 가로 141㎝, 세로 126㎝ 규격의 불교회화로 2022년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기존 불화 도상과 달리 공양물을 독특하게 표현했으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으로 이어지는 서울과 경기지역 신중도 도상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현재까지 제작 당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1839년 서양인 선교사인 모방신부와 김성우 성인에 의해 구산공소가 설립되고, 6·25전쟁 이후 1956년 신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심으로 망월리 358-3번지에 대지 502평을 매입해 현 구산성당을 건립했다. 장식이 없고 작은 성당으로 고딕 건축의 외관으로 강당형 예배당이다. 건축 구조는 무근 콘크리트 줄기초 위에 시멘트 벽돌을 쌓은 조적 구조로 창호는 세로로 긴 창이며, 부축벽을 쌓고 수성페인트로 외부를 마감했다. 문화재청 제공
용궁사 지장시왕도는 인천 중구 운남동에 있는 1폭 가로 104.5㎝, 세로 121㎝ 규격의 불교 회화로, 2022년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용궁사 지장시왕도는 1910년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승이 조성했다. 수화승은 혜과당 봉감, 동참화승으로는 한곡당 돈법이 함께 참여했으며, 지장삼존과 시왕만으로 화면을 구성해 표현했다. 인물들의 도상적 특징은 서울과 경기지역 화승의 계보를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으며 흥국사 화승 집단에 속했던 봉감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까지도 제작 당시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복장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안중근의사 유묵-일통청화공’은 안중근의사(1879∼1910)가 중국의 여순감옥에 투옥 중이던 1910년 3월에 쓴 글씨다. 장방형의 유묵으로, 흰 비단에 먹으로 썼다. 글씨는 상관·본문·하관 세 부분으로 나눠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요타선생에게 선사하다. 날마다 고상하고 청아한 말을 소통하던 분. 경술년(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삼가 절하다.’ 안중근의사의 평화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세주묘 출토 관 덮개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조선 숙종 때 이세주(1626∼1710)의 무덤에서 나온 관 뚜껑이다. 영의정 최석정은 임금이 경서를 강의하던 자리에서, 제운리(현재 학익동)에 서당을 열어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던 이세주 선생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숙종은 그에게 벼슬을 주고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처음에 이 선생의 무덤은 연수구 동춘동에 있었으나, 개발사업으로 이장해 옮겼다. 출토 당시에 관을 덮었던 선생의 이름과 관직이 쓰여진 명정(銘旌)이 관 뚜껑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터우5형 증기기관차 700호’는 1914년 제작돼 1919년부터 1935년까지 운행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터우형 증기기관차다. 운행 종료 후에는 철도학교 박물관으로 이전, 단면을 절개해 내부구조와 작동원리 이해를 위한 교육용으로 80년 이상 활용됐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이자 유일한 터우형 증기기관차로 1927년 터우6형 증기기관차를 국산화 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한 것으로도 평가받았다. 또한 1935년 식민지 상황에서 증기기관차와 철도에 관한 일제와 우리 사회의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철도 유산이다. 문화재청 제공
어사대는 인천 계양구에 있는 1.3㎡ 규모의 유적건조물로 1990년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년)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잠시 들러 휴식하던 곳으로 욕은지(浴恩池)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욕은지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고종 24년(1887년) 수리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정조는 활 쏘기를 즐겨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했다는데, 어사대에서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화재청 제공
항미정은 축만제(일명 서호)에 있는 정자로 1831년(순조 31년)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했다.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詩句)에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908년 10월2일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을 했을 때, 융건릉 참배 후 서호 임시 정거장에 도착해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도 하다. 현재의 현판은 일제강점기 사진을 바탕으로 근당 양택동 선생의 글씨를 받아 2019년 12월 제작해 현 위치에 걸었다. 정자의 주요 구조부(기둥, 보, 도리 등)가 최초 창건 때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인물사적, 건축사적, 농업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화재청 제공